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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 <곡성>의 기운

by 정재광

영화를 보고 내뱉은 첫 마디는 ‘어 모르겠다’였다. 이 영화는 뭘까. 사실관계도 아리송할뿐더러 왜 영화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일부러 모르게 한 걸까’ 하는 의심이 들었고 그걸 더 밀어붙여 보았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사방에 <곡성>의 기운이 넘쳐난다. 한 편의 영화를 두고 이렇게나 시끄럽게 떠들어 본 게 얼마 만일까. 들여다보니 영화의 빈틈을 각자의 추리와 상상력으로 메우려는 노력들이 대단하다. 누군가는 ‘감독피셜’이라는 무기를 들고 와 판을 정리하기도 한다. 영화에 좀 더 익숙한 관객들은 각종 장르 관습들을 언급하며 이 영화를 그것들의 혼종 혹은 변종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해석과 평가에 앞선 감상이 있다. 누구라도 일단 이것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감독은 –경찰 오성복의 얼굴을 빌리되 명백히 감독 자신의 목소리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겁~나게 무섭지라?”

ㅇㅇ 겁나 무서워요. 이 영화는 너무 무섭다. 15세 관람가 판정에 동의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재밌는 점은 이 영화가 무섭다는 것을, 그리고 이상하다는 것을 관객에게 자꾸만 일깨운다는 점이다. 정전된 경찰서 앞에 여자가 나타나 종구와 성복이 겁에 질렸을 때 카메라는 이 장면을 그냥 관망하고 있다. 두 경찰과 약방 주인이 산을 오르다 고라니 사체를 발견하자 보란 듯이 마른하늘에 비가 쏟아지고, 이어 벼락 운운하며 돌아서니 벼락을 맞는다. 너무 무서워서 우리도 그만 당하고 말았지만 돌아보면 이 장면들은 코미디다. 공포를 조장하는 동시에 거리를 두게 하고 있다.

의문이 특히 모이는 건 살을 먹이는 장면이다. 그 장면 직전에는 생뚱맞게 외지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굿 장면에서는 외지인과 일광이 마치 대결하는 것처럼 편집해 놓았지만, 일광이 말뚝 박을 때마다 괴로워하는 건 외지인이 아니라 효진이다.(이때 효진은 귀신에 씌인 상태가 아니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욕도 하지 않고 아부지 엄니를 알아보며 그만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죽다 살아난 외지인 앞에 무명이 나타나는 장면에선 누가 그를 공격한 건지 명확해진다. 정황 정보를 모아보면 외지인과 일광이 싸우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숨어있는 진실(일광의 좌측 주행, 훈도시 착용)보다 우리 눈에 더 잘 보이는 건 격앙된 교차편집이다. 그러니 우리는 헷갈릴 수밖에 없고 끝까지 봐도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영화의 개연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귀신은 그 마을에 들어야 했나. 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사나. 누가 같은 편이고 누가 상대편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도 한다. 질문을 바꿔보자. 2014년 4월에 있었던 일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나. 지난 봄 강남역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나. 뭐가 끌려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온갖 일이 벌어지는 건 영화만이 아니다. 낚시는 외지인이 직접 하는 소일이자,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하는 짓의 비유이자, 영화가 관객에게 가하는 시도이자, 이 세계의 우리에게 일어나는 비극이다.

넓은 의미의 종교, 가족 공동체, 어른의 성숙함, 치안/수사체계 중에 영화에서 똑바로 작동하는 게 뭐가 있는가? 한 번 더 질문을 바꾸자. 우리 현실에서 이 중에 똑바로 작동하는 게 있는가? 만약 현실에서 이 모든 게 엉터리라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이 그 정도로 엉망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절망하지 않는다. 왜일까? 우리가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공포는 무지에서 온다. 우리는 무서워지고 싶지 않다. 그러니 알고자 한다. 그러나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언제나 빈틈이 생긴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아는 걸 포기하고 믿기로 한다. 그러자 믿음에 반하는 일들이 생긴다. 그것들을 의심으로 눌러 앉힌다. 믿음과 의심 위에서 비로소 세계가 완성되었다.

<곡성>이 감독이 정의한 세계의 축소판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심각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영화라는 놀이를 통해 우리와 질문을 공유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영화의 방법/영화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장르 장치들을 동원해서 정말이지 정성스럽게 가짜를 만들었다. 진짜에 대해 잘 질문하기 위해서다. 뻔한 장치들을 보면서도 놀라고 무서워하는 것. 가짜인 걸 알면서도 마치 진짜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 이건 우리가 영화를 즐기는 방식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곡성>을 잘 보는 방법은 영화를 뜯어내고 해석하는 것보다 넋 놓고 앉아서 탈탈 털리는 쪽일 것이다. 그리고 나오면서 이 멘붕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뭐가 그리 무서운가. 온갖 장르영화에서 다 보았던 그 장치들이 여기서 특별히 무서울 게 뭔가. 무서운 것은 그 장르 장치들을 활용해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방향이다. 그게 우리가 발 디딘 세계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기를 포기하고 적당히 믿고 사는 이 세계. 여기야말로 무서운 일 투성이다. 우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사방에, <곡성>의 기운이 넘쳐난다. (16.05.20.)

영화 <곡성>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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