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리보다는 내 소신의 소리를 따라
모든 드라마에는 악당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반동 인물’이라 부른다. 앞선 글에서, 요즘 영화들이 반동 인물을 ‘동정할 가치도 없는 악당’으로만 그리는 것을 비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드라마에 악당은 반드시 필요하다. 갈등이 있어야 이야기가 전개되고, 재미있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악당이 깔아놓은 장애물을 넘으며 주인공은 성장한다. 진짜 어른은, 때로 그 악당이 되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교직 초임 시절, 나는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환영받았다. 첫날, 담임 발표를 하는데 우리반 아이들이 신발주머니를 돌리며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우리 반은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수업은 퀴즈나 게임처럼 구성했고, 교실은 늘 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 시절 나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선생이 곧 좋은 선생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생각이 달라졌다.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선생은 아니며, 아이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나쁜 선생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아이들에게 인기 없는 담임이 될 각오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책임을 배워야 할 때, 때론 엄하게 다뤄야 한다. 질서와 정당한 권위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 부드러운 말만 해서는 안 된다. 부당한 요구엔 “안 된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하고, 잘못한 일엔 “그건 네 책임이다”라고 냉정하게 말해줘야 한다. 그 순간, 우리는 아이들에게 악역이 된다. 하지만 그 역할을 누군가는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어른’이어야 한다.
학부모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학기 말,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며 늘 고민이 된다. 학기말이 되면 '그대로 쓸 것인가', '관계를 고려해 부드럽게 포장할 것인가'를 매번 고민한다. 물론, 생활기록부는 학생의 장래에 영향을 주는 공식 문서이기에, 쉽게 쓸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따로 전화드려 조심스럽게 설명을 드릴까 고민한다. 그러나 괜히 기분 상하게 할까, 관계가 어긋날까 망설이게 된다. 좋은 말을 들을 일도 아니고, 괜히 일만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그냥 덮어버린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게 정말 아이를 위한 길인가? 기분을 맞춰주는 것과 아이를 돕는 것이 언제나 같은 방향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선 장에서 수학여행을 두고 동료들과 다른 목소리를 냈던 이야기를 했다. 사실, 나 역시 여론에 편승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면서, 회의 시간에 벌떡 일어나서 발언한다는 '벌떡 교사'나 불편과 이의를 제기하는 '불편러'들을 불편해 한다. 나도 대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살아왔고 나 역시 물을 흐리지 않고 그냥 조용히 다수의 흐름에 따라가며 살았다.
그러나 우리 학교에 오면서부터, 다수의 흐름과 다르더라도 ‘이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말하고 행동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다른 선생님들이 학예회를 학부모 없이 조용히 교실에서 진행하자고 할 때, 나는 초청 행사를 하자고 주장했다. 공개 수업도 수시로 해보자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수학여행도, 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혹자는 오해할 수도 있다. 관리자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 아니냐고. 나 역시, 나의 의도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그런 마음은 10% 미만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관리자에게가 아니라,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떳떳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그 길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유난스러운 선생’, ‘말 많은 사람’으로 통한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지금, 어른이 되기 위해 ‘악당’이 되어 보는 중이다.
누군가에게는 미움받고,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존재가 될지라도, 그 갈등을 감내하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몫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