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입장을 번갈아 신어본다는 것
요즘 학교 현장은, 아니 전국의 교육계 전체가 체험학습 이슈로 들끓고 있다. 체험학습 도중 한 학생이 사고로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고, 그 인솔 교사가 파면되었다. 그러자 많은 학교에서 체험학습을 전면 중단하거나, 연기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선생님들 편하자고 체험학습 안 하겠다는 것 아니냐”, “너무 몸사리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쏟아낸다.
우리 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수학여행을 앞둔 6학년은 논쟁의 중심에 있다. 담임 교사들은 꺼려하고, 학교는 조심스럽고, 학부모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심지어 야영 수련을 앞둔 5학년, 소규모 체험학습을 준비하던 다른 학년에서도 “올해는 안 하는 게 낫겠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 사람의 교사로서, 나 역시 분하고 답답하다. 그 교사의 잘못이 그렇게까지 중한 것인가. 아이들을 학교 밖으로 데려가는 체험학습이 교사에게만 전적인 책임이 돌아오는 구조는, 도무지 공정하지 않다.
어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내년에 체험학습을 가는 건 괜찮지만, 지금 당장 가는 건 우리가 얼마나 힘없는 존재인지를 인정하는 꼴 아닌가요?”
특히 몇몇 교사들이 학부모의 갑질과 압박으로 목숨을 끊었던 사건들을 떠올리면, 교사들의 입장에서도 울분이 터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학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또 다르다.
며칠 전, 딸아이가 학교 야영을 다녀왔다. 가기 전부터 “뭘 먹을까?”, “텐트 안에서는 뭘 하고 놀까?” 하는 말에 온통 들떠 있었다. 어떤 친구와 한 조가 되는지를 두고 고민하고, 양보하고, 조정하는 모습 속에서 나는 작은 성장을 느꼈다.
물론, 다녀와서 불편했던 점도 있었고, 실망했던 이야기도 꺼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경험은 소중한 배움이었다. 아이에게 학교 밖 세상에서 친구와 부딪히고, 적응하고, 스스로 해보는 기회를 주는 일. 그게 체험학습의 참된 의미 아닐까.
그래서 나는 학년부장으로서 “가자”고 말한다. 더 철저하게 안전 대책을 세우고, 복잡한 행정 절차도 감수하더라도, 아이들에게 그 경험을 빼앗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말을 꺼낸 순간부터, 돌은 조용히 날아오기 시작했다. 직접 욕을 듣진 않았지만, 나 없는 자리에서 좋게 말할 리 없다. 모든 학년이 “올해는 자제하자”는 분위기인데, 한 놈이 나서서 “우리만 가자”고 설치고 있으니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게다가 ‘아이들을 위해서 간다’는 명분까지 들이대고 있으니 더 얄밉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 생각 안 하는 교사냐고?” 그렇다. 나는 유별나게 구는 선생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교직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 전교조가 합법화되던 시기였다. 신규 교사들은 당연하다는 듯 노조에 가입했고, 학교장은 강성 조합원들과 팽팽히 대립하곤 했다. 나는 그 광경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초임 교사였다.
그러다 어느새 관리자들과 나의 나이차가 점점 좁혀지며 나는 관리자들도 한 명의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결정하는 걸 두려워하고,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며,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두려워할 필요도, 미워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유아용 애니메이션에서는 아이들의 인성 교육을 위해 절대적으로 악한 캐릭터를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캐릭터는 잘못을 하지만 그 행동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결국엔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성장하므로,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반면, 요즘 나오는 영화들 속 악인은 대개 ‘응징의 대상’일 뿐이다. 조커처럼 악인의 서사를 따라가며 복잡한 감정을 유도하는 영화는 오히려 낯설다. 사람들은 절대악을 설정하고, 영웅이 그들을 시원하게 박살내는 이야기에서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절대악은 없다. 내가 미워하고 싶은 누군가가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이 가진 맥락과 배경을 ‘신발을 신고’ 걸어보지 않으면, 쉽게 정죄하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설사 그가 나를 향해 돌을 던질지라도, 그 신발을 신고 걸어보려는 시도. 그게 어른의 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