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별의 별 사람들을 다 만나보았지만 이렇게 일머리 없는 사람은 정말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역대급인 버스기사와 일한지 4일째이다. 그는 내 인내의 한계를 맥시멈으로 시험하는듯 여전히 모든 약속시간에 늦게 나타나며 목적지를 코 앞에 두고도 바로샐려나로 빠져나가 가까운 길 멀리 돌아가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구글맵에 좌표를 찍어줘도 놀라운 해독력으로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헤매는데 조금도 개선될 조짐이 보이질 않는다.
론다(Ronda)에서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론다에는 버스를 타고 내릴 수 있는 터미널이 딱 한 군데 밖에 없다. 론다로 가는 모든 버스는 이 곳에서 승객들을 하차시키며, 론다에서 출발하는 모든 승객들 역시 이 곳에서 버스를 탄다. 그런데 나의 기사는 이 하나 밖에 없는 터미널로 가는 길을 론다에 다 와서도 못찾고 헤매다가 결국은 동네 사람의 호송을 받으며 겨우 찾아갈 수 있었다. 목적지에 다 와서 헤매기라는 특기를 여지없이 발휘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위축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탄식일 수도 있고 기도일 수도 있다. “Jesus!”
론다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출발하는 장소 역시 동일한 터미널이기에 약속시간을 미리 정하고 천에 하나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구글맵으로 좌표를 찍어주고 미리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Vale(알겠다)!”이다. 그러나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가기 전부터 그렇게 확인하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버스들은 있는데 우리 버스만 여지 없이 나타나지 않는다. 전화해도 안받고 메시지도 안읽고… 빠듯한 일정을 진행하려면 5분도 큰데 그는 기어이 20분을 꼬박 기다리게 한 후에야 잠에서 깨어난 모습으로 부랴부랴 나타난다. 내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쌍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씨에스타를 즐기다가 온듯한 그를 대체할 수 있는 기사가 없어서 해고할 수도 없는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또 다시 밀린 시간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세비야(Sevilla)에서
플라멩꼬의 본고장인 세비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택관광 프로그램은 단연 플라멩꼬 쇼이다. 거의 모든 관광객들이 저녁식사와 함께 또는 저녁식사 이후에 이 쇼를 보러 가기 때문에 극장 앞은 항상 수많은 관광버스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우리 여행팀 역시 저녁식사 후에 플라멩꼬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이동했다. 1시간 반 동안 진행되는 쇼가 끝나면 바로 호텔로 이동하는 일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버스들은 극장 앞길에서 대기하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쇼가 끝나기 30분 전에 밖으로 나와 우리 버스의 위치를 확인했지만 안보인다. 20:30 출발하는데 어디 있느냐고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다. “지금 오고있는중”이라는 회신이 왔지만 결국은 시간이 되어도 안나타나고 전화를 해도 안받고… 설마 하는 우려는 또 현실이 되어 다른 모든 버스들이 떠나고 나서도 한 참을 기다려서야 우리 버스가 나타났다. 그가 말하는 1min은 1분이 아니라 10분이 될 수도 있고 15분이 될 수도 있는 고무줄이라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그렇게 가장 기본적인 시간약속도 지키지 못하면서도 자기의 몫은 꼬박꼬박 챙기는 그를 언제까지 용납해야할 것인가! 매일 팁은 물론 매끼 식당에서 밥을 챙겨줘도 안먹고 현금으로 식사비를 별도로 요구하는 그와 어디까지 함께 가야할 것인가? 울화통이 터지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내게 주어진 현실은 끝까지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며 안고 가야 한다고 나의 맥시멈 관용을 강요하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인내심 테스트가 정말 빡세다.
- 2025.1.4 Sevil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