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박지윤 - 바래진 기억에
매 순간이 첫사랑이었다. 모든 사랑이 항상 같은 기준으로 책정될 수 없으니 정도와 순위를 매기는 것은 어리석다. 나의 연들은 모두 내게 생소한 마음을 쏟았고 생소한 것은 내게 늘 처음으로 자리 잡았다.
첫사랑이란 표현은 생각 외로 부질없다. 첫사랑의 기준에 대한 질문과 글이 종종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것을 보면 더욱이 그렇다. 나는 늘 처음 사랑하고 늘 첫사랑과 함께한다. 내게 당신은 늘 처음이다.
지금, 당신의 첫사랑은 무엇인가?
나는 태어나 처음 본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남자주인공을 사랑했다. 꼭 그가 실존하는 인물처럼 친구들에게 말하고, 그의 존재를 그리워했으며, 계속해서 그 영화를 돌려보며 연애 비슷한 것을 했다. 여자 주인공에게 나를 빗대어 상상하며 그의 실존을 굳혀나갔다. 그러다 결국엔 그가 죽었다고 말하고 다니며 슬퍼했다. 무엇 때문에 죽었다고 설명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좀 더 자란 후엔 고양이 형상을 띤 캐릭터를 사랑했다. 그것이 없으면 안 될 것처럼 굴며 눈에 띄는 캐릭터 상품을 모두 사들였다. 침대 위에 인형들로 가득 채우곤 마치 사랑을 나누듯 그것들을 매일 돌려가며 안고 잤다. 그러다 그것은 내게 분신이 되었다. 사랑이 아닌, 필요가 됐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엔 친구의 남동생을 사랑했다. 어떻게든 닿고 싶어 친구에게 만나자고 계속 졸라댔다. 어쩌다 한 번씩 친구의 집에서 남동생을 볼 때면 내게 한 번이라도 말을 걸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일부러 튀는 옷을 입거나 이따금 울기도 했다. 남동생이 나를 아는 체하는 것이 좋았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만 하는 남동생을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머릿속으로 끌고 와 여러 번 연애했다. 만났다 이별하기를 반복하다 결국 정말로 연애를 하게 됐을 땐 남동생을 사랑하지 않게 됐다. 처음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고찰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나는 학과에서 가장 말수가 적은 여자 동기를 사랑했다. 존재감이 없어 동기들이 아무도 술자리에 불러주지 않는 그 여자애를 사랑해 자꾸만 옆에 붙어 이것저것 말을 붙였다. 그 여자애는 결국 휴학을 하고 다른 학교로 편입했지만 우리는 가끔씩 만나 옆에 붙어 서로에게 말을 붙였다. 이게 사랑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러다 여자애는 얼굴이 희고 키가 큰 남자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게 사랑이구나. 나는 또 생각했다. 얼마 있지 않아 나도 비슷한 류의 남자를 만났다. 다시 사랑이 무엇인지 고찰했다.
취직을 한 후에는 유부남 상사를 사랑했다. 나에게 베푸는 친절이 꼭 사랑 같아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을 열심히 했다. 좋은 실적을 낼 때마다 상사는 내게 멋진 저녁식사를 대접했고, 나는 그것을 데이트라 여겼다. 개인적인 연락도, 애정 섞인 표현 따위도 없이 나는 상사와 일방적인 사랑을 했다. 어느 날 상사는 딸을 출산했다며 기뻐했다. 왠지 딸이 정말 예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상했다. 또 다시 사랑이 무엇인지 고찰했다.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겨 비슷한 또래의 남자를 만나 정식으로 연애란 것을 했다. 사귄 날짜를 세고, 커플링을 교환하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나는 많이도 웃었다. 남자는 내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빛을 쏟아내며 나를 만졌다. 나도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남자를 만졌다. 꼭 사랑이 만져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남자는 내게 결혼하자며 청혼했다. 거절했다. 결국엔 사랑이 무엇인지 고찰했다.
매 순간이 처음이었던 나의 사랑.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의 사랑.
지금, 당신의 첫사랑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