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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립 Nov 08. 2024

그녀의 이름은 영

BGM
밍기뉴 - 나아지지 않는 날 데리고 산다는 건


그녀를 처음 봤던 것은 내가 총학생회에서 추진한 ‘올바른 우리말 사용’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맡았을 때였다. 주제에 걸맞게 강연은 내가 속한 국어교육과에서 꾸려나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학우들은 제비뽑기로 강의를 펼칠 학과를 골랐다. 나는 체육학과였다. 그녀는 내가 강의하는 앞에 앉아있었으므로 당연히 체육학과 소속이었을 것이고,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강의를 끝내고 강의실을 빠져나가려고 하던 때에 뒤풀이하러 가자며 체육학과 소속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자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무 생각 없이 나의 강의를 도와줬던 과 후배들과 정리를 한 후 나서는데, 앞줄에 앉았던 남학생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같이 가자고 말했다. 휘몰아치는 과제 제출 기간도 끝나고, 시험 기간은 멀었으므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후배들과 함께 체육학과 사람들과 술을 먹게 되었다. 


앉자마자 술게임에 열을 올리며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술을 마셨다. 나는 그때만 해도 술을 꽤 잘 먹는 편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의자에 기대어 자거나, 집으로 도망가거나, 화장실에서 구토하느라 못 나왔다. 그녀는 내 앞에 앉아 말없이 소주만 들이켰다. 안주도 없이 술을 먹기에 나중에 속 다 버린다고 안주와 같이 먹자고 말하자 그냥 피식 웃었다. 


ㅡ사범대에서 유명하던데.

또 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이구나 싶어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ㅡ꾹 참고 못 들은 척하면 병신 되는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또 술을 먹었다.      


나는 대학 입학을 앞두고 친구의 지인을 알게 됐다. 그는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남자였다.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주유소를 운영한다기에 그 말만 믿었다. 알고 보니 가짜 휘발유를 직접 배달하는 일을 했다. 그는 신용카드도 쓰지 않고 무조건 현금만을 이용했다. 그땐 너무 어려 그가 하는 일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계속 나와의 교제를 밀어붙였고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끌려다니며 좋아하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남자와 첫 연애를 하게 됐다. 


그는 상당히 집착이 센 사람으로 내 휴대전화에 위치추적 어플을 깔아 감시하고, 시시때때로 학교로 찾아와 우리 과 사람들에게까지 겁을 줬다. 그 후 알고 보니 감옥살이도 몇 번 했던 사람이었다. 그때 이미 나는 과에서 조폭과 사귀는 아이로 소문이 났다. 그러다 헤어졌다. 그 후로는 남자가 무서워 연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모두 다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친구라고 생각했던 남자들은 하나 같이 내게 사귀자고 말했고, 나는 거절했으며, 그때마다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소위 말해 흘리고 다니는 여자라고.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해명할 자리가 없었다. 모두 내 앞에선 웃으며 잘해주고 뒤에서 쑥덕거리니 매일 악몽에 시달렸고, 학교만 가면 위경련이 일어났다. 그래도 꾸역꾸역 학교에 다녔다.      


ㅡ나 알아요?

ㅡ사범대에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ㅡ그럼 좀 전해주세요. 남의 인생에 참견 좀 하지 말아 달라고.


내 소문을 듣고 내 얼굴까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없이 불쾌해져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참견 안 해요. 막 등을 돌리고 나서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그저 자기 견해 표명일 수도 있고 아무 뜻 없이 내 말에 대꾸하기 위해 뱉은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마음 한쪽 구석에서 진동이 울림을 느꼈다. 왜였는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나는 나를 공감하며 응원해 주며 원래의 나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봐주는 이보다 무덤덤하게 나를 나로만 봐주는 이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에 지쳤다. 내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뭐에 홀린 듯 자리에 앉아 술잔을 들이켰다. 


ㅡ이제 체대에서도 유명해지겠네요, 나.

ㅡ이미 유명할지도 모르죠.


그녀는 끝까지 표정 없이 술잔만 들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나 또한 오르락내리락하는 술잔을 바라보며 입 속으로 계속해서 술을 털어 넣었다. 나는 학과에서도 술을 꽤 잘 먹는 편에 속했다. 그래서 이야기가 더 나돌았는지도 모른다. 뒤에서 얼마나 굴러먹었으면 술을 저렇게 잘 먹겠나, 술자리에서 오래 버티는 일을 했을 거다, 같잖은 말들을 많이 들었다. 내가 술을 잘 먹는 건 순전히 유전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지금 생각건대 내가 술을 잘 못 했어도 취한 척 남자를 꾀는 여우라고 소문이 났을 거다. 그냥 숨만 쉬어도 욕을 먹을 때였으니까.


모두 술을 잔뜩 먹어 제 이름도 무엇인지 모를 때까지 시간이 흘렀을 땐 이미 그녀와 나만이 이 자리의 기억을 내일 가지고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자리를 파하는 분위기가 흐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앞자리의 그녀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별다른 인사는 하지 않은 채 술집을 빠져나오는데 그녀가 내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나는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었기에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말하며 대화를 자르고 발길을 돌렸다. 그녀가 자박자박 나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휙 돌려 그녀를 보자 그녀도 발길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ㅡ왜 자꾸 따라와요?

ㅡ무슨 일 생길까 봐.


내가 뭐라고 하건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고집불통의 스타일인가 싶어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정말 내가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했던 것처럼 내가 집 근처에서 도착했다고 혼잣말하듯 내뱉자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왔던 길을 뒤돌아 가려고 했다. 꼭 그녀에 관한 무언가를 물어보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그녀의 멀어지는 뒤꽁무니만 바라보았다.     


나는 늘 구토로 마무리하는 술자리를 가졌다. 잔뜩 먹은 것을 잔뜩 토해내고 나면 마치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없어져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 들어서다. 아니, 핑계인가. 다들 부러워할 만한 마른 몸을 가지고 있던 나는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면서 급격히 살이 쪘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 후로는 먹는 것에 강박을 가지고 있다. 아마 그게 제일 큰 이유겠지. 먹은 것을 모두 토하면 지방으로 축적될 수 없으니까. 어리석은 생각이고 어린 행동인 걸 알고 있지만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이미 돼지 같은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먹은 것을 다 게워내고 깨끗하게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누웠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 떠오르는 걱정이 없다는 게 행복이라던데, 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 여태 행복이라는 활자를 봐도 무슨 느낌인지 몰랐나 보다. 무슨 일 생길까 봐 쫓아왔다는 그녀가 다시 한번 생각났다. 처음 본 사람이 다시금 생각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키가 컸고 대충 보아도 오랜 시간 동안 운동을 한 탄탄한 몸이었다. 짧은 커트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 꼭 장례를 치르는 중인 사람 같았다. 무슨 일 생길까 봐 따라왔다는 건 내가 아니라 본인에게 생길까 두려워 따라온 것일까. 표정이 어두웠던 것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자꾸만 생각났다. 어쩌면 남의 인생엔 참견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에 내가 안심한 것일 수도 있다. 나를 꼭 나쁘게만 보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구나 싶어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말투에서 나는 그런 것을 느꼈다. 우스웠다.     


여느 때와 같이 동기들과 텁텁하게 인사하고 홀로 앉아 3학점짜리 강의를 묵묵히 들었다. 쉬는 시간에도 나는 좀처럼 자리를 움직이지 않는다. 가방에는 늘 책을 한 권 들고 다닌다. 비는 시간마다 읽으며 무료함을 잊기 위해서다. 다들 내게는 기본적 사람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꼭 해야 할 말만 주고받는 사이라는 뜻이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처음엔 화장실로 몰래 숨어들어 눈물 몇 방울을 훔치곤 했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임이 틀림없다. 차라리 누가 말을 걸어 귀찮은 대화를 이어가는 것보다 책 속의 글자에 파묻히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 되었다. 조금 슬프기도 했다. 그리고 우스웠다.


강의가 끝나고 여태 그랬듯 제일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사범대학 건물 정문 앞에 조금은 낯이 익은 실루엣이 서 있다. 그녀다. 담배를 물고 땅만 쳐다보고 있다. 다가가야 하나 모른 척 지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그리곤 담배를 밟아 끄고 내게로 온다. 


ㅡ점심이나 같이 먹죠.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려놓곤 그녀의 옆에 붙었다. 바로 옆에 서니 키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이런 피지컬을 가진 사람이 운동하는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뭐 먹어요? 내가 묻자, 뭐 먹을래요? 도로 되묻는다. 점심을 누군가와 같이 먹는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수업을 함께 듣는 동기들과 점차 거리가 생기면서 나는 늘 혼자 점심을 해결했다. 그러다 보니 늘 샌드위치와 같은 핑거푸드를 먹게 됐다. 그랬기에 메뉴 선정이 매우 어려웠다. 내가 쉽게 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그녀가 대뜸, 이제부터 공강이에요? 묻는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와 아무런 대화 없이 성큼성큼 학교 밖을 빠져나갔다. 그러면서도 내가 잘 오고 있는지 뒤를 한 번씩 훑어보았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순대국밥을 파는 곳이었다. 싫어하냐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가자마자 메뉴를 시키고 또 당연하다는 듯 소주 한 병을 주문한다. 


ㅡ대낮부터 술을 먹어요?

ㅡ근데 한잔하고 싶잖아. 아니에요? 나오는 표정이 딱 그렇던데.


이 여자는 도대체 나에 대해 어떻게 잘 아는 걸까? 20년 넘게 살아온 우리 엄마도 내 속을 모르겠다며 답답해하는데, 이 여자는 나와 안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내 표정을 읽는다. 신기하다. 그러나 나는 이 여자의 속내를 전혀 모르겠다. 늘 똑같은 표정에 늘 검은색인 옷. 내가 물어도 딱히 대답을 안 해줄 것 같아 아예 묻지도 않았다.


소주 세 병을 말없이 둘이 앉아 해치워버렸다. 빈 소주병을 보니 괜히 눈물이 났다. 아, 화장 지워지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을 먼저 했다. 그런 나의 사고방식이 퍽 웃겼다. 그녀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티슈 몇 장을 뽑아 내게 말없이 건넸다. 나는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뒤따라 나와선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내게 담뱃갑을 내밀었다. 한숨을 크게 들이쉬고 한 개비를 꺼내어 그녀가 붙여주는 불에 한 모금 빨아들였다.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 담배를 피우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ㅡ우리 되게 낭만적이네요.

ㅡ이런 거에 낭만을 느껴요? 의외네.

ㅡ다음 수업 없어요?

ㅡ있어도 없어야죠.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내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힘차게 걸어갔다. 도착한 곳은 학생들이 아무도 찾지 않는 낡은 연못. 그녀는 익숙한 듯 앉을 곳을 찾아 터를 잡는다. 그리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길래 옆에 엉거주춤 앉았다. 그녀는 대뜸 나에게 손을 잡으라고 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ㅡ제가 왜 손을 잡아야 돼요?

ㅡ그냥. 이렇게라도 지탱해주지 않으면 금방 쓰러질 것 같아서요.

ㅡ내가 누군지 알아요?

ㅡ알죠. 국어교육과 09학번. 


터무니없는 대답에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와 버렸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내민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다, 고민을 아주 살짝 하다가 그 손 위에 내 손을 살며시 포개었다. 그녀가 내 손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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