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사람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선을 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넘고 싶은 마음을 알아달라는 듯이 선을 넘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해댔다. 그 사람은 그 말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맙다던가, 그럴 필요가 없다던가, 뭐 그런 대답을 한 적이 없었다. 처음 그 사람과 키스한 것은 그저 그 빌어먹을 호기심 때문이었다. 죽기 전에 무엇이든 해내야겠다는 강박 같은 호기심. 서른이 되기 전에 모든 것을 해보고 죽어버리겠다는 호기로운 결심. 그런 생각이 나를 쉽고 우습고 헤프게 만드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그날 이후로 그 사람의 연락은 잦아졌다.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 같다는 말을 했다. 애인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횟수가 늘었다. 애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내가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을 대견해했다. 나는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을 칭찬받으며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내고 있었다. 애인을 사랑하는 것도, 그 남자에게 주는 내 몸이 아까운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떤 면에선 나는 참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죄책감마저 무기력이란 핑계 아래 갖지 않는.
애인은 해외 출장이 잦았고, 늘 그렇듯이 또 해외로 출장을 떠날 채비를 했다. 애인은 내가 원래 잠자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고, 강요 같은 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날은 유독 보챘다. 할 수 없이 벌린 다리에서 나는 끔찍하게도 그 사람을 떠올렸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 사람이 나를 만나면 꼭 하는 것이 있었다.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일. 그 사람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했고, 나는 점점 더 무릎을 꿇어야 했다. 눈이 예쁘다는 말은 나를 계속 개처럼 굴게 했다.
마침내 나는 그 사람 앞에 엎드려 그 사람의 가장 아래서 사랑을 했다. 그 사람은 내가 좋다고 말했고, 나는 그 이상의 표현은 없는 줄 알았다. 내가 개인지, 개처럼 구는 인형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을 때까지 왔을 때 그 사람은 입을 열었다.
나 같은 새끼들은 너같이 완벽한 밤은 못 잊겠다.
내 목선을 훑던 손가락이 가슴 사이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두 손 가득 나를 움켜쥐었다. 나도 꼴에 남자라고 너를 놓치기가 싫네. 내 텅 빈 눈동자를 채워줬던 그 사람의 목소리는 애석하게도 밤에 짙어졌다. 나는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이름밖에 모르는 그 사람에게 나를 줬다.
그 사람은 연락이 갑작스럽게 끊길 때가 많았다. 구태여 기다리지 않았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회사 일은 점점 버거워지고, 회식도 잦아졌다. 회식이 있는 날이면 우리는 무조건 몸을 섞었다. 서로 술을 얼마나 먹었는지 서로의 혀를 탐하며 확인했다. 그리곤 먼저 가버렸다. 나는 애인과의 연락이 점점 소홀해졌다. 애인은 그것에 불만을 표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내가 그에게 말한 것 중 사실이 아닌 것은 없었으니까. 일이 많아졌고, 회식이 잦아졌고. 말하지 않은 것은 있었으나 거짓말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를 합리화했다. 그러면서 그런 나를 역겨워했다. 얼마 못 가 이별을 통보했다. 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정의감에 짓눌려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애인이 아닌 그 사람을 택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자주 부딪혀야 한다는 것. 나는 사람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불편함은 참을 수 없었기에. 사랑 없이 몸을 섞은 것도 처음이었다. 모든 게 능숙해 보이는 그 사람과 달리 나는 한 명의 관람객처럼 그의 움직임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날엔가는 글을 쓰는 것이 취미라고 말하자 자신을 위한 글을 써달라고 했다. 어떤 문장을 던져주며 그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을 지어달라고 했다. 5분도 안 걸려선 한 문단을 써서 보여주었다. 내 생각 하면서 썼죠? 그가 묻기에 나는 또 그게 괘씸해져 일부러 더 강하게 긍정했다. 그 사람은 종종 와이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치곤 회사 건물 뒤편에서 담배를 태웠다. 그것을 볼 때면 그제야 나도 답답한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 모습을 그렸다. 활자 하나하나 꾹꾹 당신 생각을 담아 썼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호쾌하게 웃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또 그게 괘씸해졌다.
출근하지 않는 휴일에 늘 그랬듯 뜬금없이 그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나 돌려서 말 못 하는 거 알죠? 그 사람은 늘 서로를 잘 안다는 듯이 굴었다. 우리가 아는 건 어디를 핥고 어디를 자극해야 최고조에 이르는지 이런 것뿐이면서 서로라는 인간을 잘 아는 것처럼, 그게 못 견디게 좋은 것처럼 굴었다. 자꾸 그 사람과 내가 특별해지는 듯해서 불안해졌다. 그 사람은 내게 호텔로 오라고 말했고, 나는 고분고분하게 택시를 타고 향했다.
참 오랜만에 넓은 침대에서 뒹굴었다. 그 사람과 나는 그것에 대해 떠들었다. 벌거벗은 채로. 그 사람의 문신이 살아 움직일 듯 나를 노려봤다. 그 사람과 잠자리를 가질수록 갉아 먹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간 내 육신이든 내 마음이든 다 잡아먹힐 듯했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요. 오랜만에 집에 혼자 있어서.
그 사람은 맥주를 들이켜며 말했다. 그것을 본 나는 별말 않고 따라 맥주를 삼켰다. 그는 새우 알레르기가 있냐고 택시를 타기 전 물어봤고 탁자엔 새우 과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이런 다정함이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회사에서 이따금 메신저로 킥킥대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고, 아무도 없는 곳에 있을 때면 입술을 스치며 해선 안 될 짓만 골라서 했다. 애인과의 이별 같은 것에 슬퍼할 새가 없었다. 그 사람을 맛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오열했다. 무엇으로 정의할 수 없는 공허함이었다.
우리 오래 봐요.
그 사람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어떤 뜻으로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닐 것 같았다.
지금 이 거리에서 오래 봐요.
역시나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게 왜 좋은 의미가 아닐까. 나는 이 사람과 뭘 더 하고 싶은 걸까. 선 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내가 말했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선이랄 게 있을까. 이미 넘은 상태로 시작해 버린 사이에. 내가 말하는 선과 그 사람이 흡족해하는 선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하지 않을게요. 어쩌면 같은 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픈 것은, 그 말이 튀어나왔다는 게 이미 그렇다는 방증이라는 거다.
생각해 보면 나는 새우 알레르기는 없으나 사랑 알레르기는 있는 듯했다. 처음 만난 남자친구와도, 그다음 남자친구와도, 결혼을 원했던 애인과도 나는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 사랑이란 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이기에 나눠 먹을 수가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 같은 게 도대체 무슨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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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땀으로 끈적해진 살갗을 비비느라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른 채 지냈다. 그 사람은 함께 맞는 가을에 의미 부여를 했고, 나는 또 부여되는 그 의미가 좋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우리라고 부를 수 없는 그 사람과 내게 여름은 관계의 절정인 듯했다. 절정의 다음은 무엇일지 고민했다. 가을엔 다른 의미의 절정에 다다를 수 있을까. 나는 또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근 채 일하는 그 사람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는 '전'을 앞에 붙여야 하는 애인에게선 가끔씩 연락이 왔다. 흔한 안부도 아니었고, 원망 섞인 토로도 아니었다. 잘 지은 산문 몇 구절을 보내왔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봐도 나오는 게 없는 것을 보면 본인이 지어낸 듯했다. 몇 개의 문장들은 모두 하나같이 살아달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목숨을 끊을까 늘 전전긍긍했었다. 애초에 이 회사에 입사하게 된 계기도 지독한 우울증 때문이었으니까. 본인이 권유한 회사에서 바람 아닌 바람이 난 여자친구에게 살아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심정은 대체 뭘까. 감히 유추할 수도 없어 답장 없이 휴대폰을 껐다.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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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동성 친구를 만났다. 교수와 성 관련 파문을 일으켜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을 때도 유일하게 내 곁을 지켰던 대학 동기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며 휴학하고 조용히 복학해서 나와 함께 졸업했던 그녀는 졸업 이후 몇 년간 더 시험을 준비하더니 결국 합격했다. 그 합격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내가 공무원에 목을 맨 이유를 묻자 그녀는 안정적이라는 짧은 대답을 했다. 안정. 평소 생소한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는 습관이 있던 나는 안정이란 단어가 생소해져 찾아봤다. 바뀌어 달라지지 아니하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함. 바뀌는 것이 없는 인생을 구태여 노력해서 가지려는 이유가 뭘까. 나쁜 상태로 안정적일 수도 있는데. 혼자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 연애가 목표라고 했다. 남자친구를 만들어 행복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학부생 시절, 둘이 함께 술을 퍼먹으며 지나가던 남자들을 품평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녀는 너무나 소소하고 유치해서 남들은 입 밖으로 잘 꺼내지 않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었다. 난 키 큰 남자가 아니면 만나고 싶지 않아, 라던가 모델처럼 마른 남자가 좋아, 와 같은 이야기들. 내가 이상형은 여전하냐고 묻자 이제 그런 건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우리 나이에 뭘 따져. 그녀는 그렇게 덧붙였다. 내가 그저 평범하게 연애하는 줄 아는 그녀가 내게 부럽다고 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지도 않고, 안정적인 연애를 하지도 않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그저 웃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녀는 소개팅을 했고, 거기서 만난 남자와 마음이 잘 맞아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섯 살이나 어린, 유치원 교사 임용 대기 중인 남자와 연애하게 됐다고 했다. 잘 됐다. 내가 짤막하게 답하자 그녀는 학생이었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그 남자가 얼마나 귀여운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나는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켜두곤 다른 일을 하며 건성으로 들었다. 다른 이의 행복을 들어줄 만큼 나는 안정적이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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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관계에 이름을 붙이려는 욕망이 있었다. 소유하고 탐닉하는 관계에 특히 그랬다. 다 떠나버린 지금 나는 어떤 관계의 이름을 위해서 이토록 애를 썼는지 의문이다. 관계에 이름이 붙는다고 해서 그게 진정 나만의 것이 되는 건 아닌데도 끔찍하게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그 이름을 목구멍으로 쏟아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