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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선 Jul 07. 2024

갑과 을의 관계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통화를 한다는 건 참 두려운 일이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엔 잘 몰랐다. 일을 시작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두려웠다. 어떤 고객과 통화할지 모르는 두려움, 내가 실수를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 같다.  얼굴을 보면서 하는 대화가 아닌, 수화기를 통해서 대화를 나눠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을이고 수화기 너머의 고객은 갑이었다. 갑과 을의 관계는 아무리 친절한 상담을 하여도 약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상담원의 말투가 기분 나쁘게 드릴 수도 있고, 친절하게 드릴 수도 있는 거였다. 난 죄를 짓지 않았지만, 갑 앞에서 죄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화기 너머에 있는 목소리는 더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난 이곳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4년이란 시간을 보내면서도 적응이 안 됐다. 일을 하다 보면 갑과 을의 관계에서도 요령이라는 게 생길 만도 한데, 난 그게 안 됐다.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했다. 그러고 교육과정 중 실습과정이 있었다. 단 1시간 정도 실전에 투입되어 콜을 받는 업무였다. 첫 실습이었고,  내가 한 실수로 인해서 회사에 불편함을 주면 안 됐다. 혹시라도 손해를 주거나, 실수로 인해서 보상을 하거나, 내 윗사람을 바꾸는 행위 등등 나 하나로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았다. 제발 실수만 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첫 콜을 받았다.


나는 첫날 첫 콜을 받고 내 바람과 다르게 고객과 통화 중 클레임에 걸렸고, 내 담당 슈퍼바이저와 함께 손을 잡고 울었다. 정말 첫 콜이었다. 난이도 상 고객이었다.


 '띠리릭'(콜이 꼽히는 소리)

 "안녕하십니까  ㅇㅇㅇ 고객님 ,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인콜: 내가 거는 형식이 아니라 전화가 들어오는 형식) 콜이 들어오면서 고객의 정보창이 함께 팝업 된다.

 "방송 중 물건 주문하고 싶은데요."

" 네 고객님. 주문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방송 중 제품 ㅇㅇㅇ, 1개 주문하는 거 맞으시고요?"

(중간 주문 멘트는 생략)

" 카드와 현금 어떤 것으로 주문 도와 드릴까요?"

" 카드와 현금 함께 할게요."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드와 현금으로 결제를 한다고 하셨다. 여기서 나는 꼬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시스템상 결제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일어났다. 그래서 고객은 화가 났다. 더군다나, 신입생들이 투입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이 고객은 나와 통화를 하기 전 벌써 다른 신입 상담원과 통화를 한 상태였다.


"아니, 오늘 왜 그래? 다들 신입들만 앉아 있어. "

" 죄송합니다. 고객님. 빠르게 처리 도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됐고, 윗사람 바꿔."

담당자님이 옆으로 오셔서 전화를 연결하라고 하셨다. 난 고객이 윗사람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을 첫날 알게 됐다. 그날은 신입을 담당하고 있는 강사님 겸 슈퍼바이저 님이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께 전화를 연결해 드렸다. 그렇게 담당자님은 내가 싼 실수에 대신 사과를 하고 포인트도 주면서 마무리를 했다. 그러고 나를 부르셨다.


" 지선 씨, 방금 고객이 요청한 사항은 신입들에게 있어서 좀 힘든 요청이었어요. 그래도 침작하게 잘했어요."

" 죄송합니다. 담당자님. 제가 잘못해서..."

눈물이 났다. 담당자님은 따라 우셨다. 남이 울면 따라 우는 스타일이라고 하셨다. 고마웠다. 난생처음 겪는 일에 눈물까지 흘렸는데 함께 울어 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만약 그날 담당자님이 나에게 화를 내거나, 클레임을 건 고객이 나와 해결하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식은땀이 나는 것 같다.






나는 교육을 끝내고 상담원일을 시작했지만, 난 실습 첫날 고객과 나의 관계가 갑과 을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소 슬프지만 그렇게 인정해 버리니 마음이 편했다. 너무 빨리 포기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때론 수화기 너머의 고객이 잘못을 했지만, 난 무조건 죄송하다고 이야기했다. 가끔 변태적인 전화가 와도 나 스스로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변태라도 고객으로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동안 규칙이 바뀌긴 했지만, 초반 일을 시작했을 때는 변태라도 고객이 전화를 끊기 전 내가 전화를 먼저 전화를 끊으면 안 됐다.

부도덕한 일이라도 난 죄송하다고 이야기하는 상담원이 됐다. 그때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참 힘들었겠다. 안 그래도 전화통화가 어려웠던 나인데 모르는 사람과 하루에 몇 백통에 가까운 운  CS 통화를 해야 했으니 말이다. 내가 4년 이상 일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많다. 나는 이글이 코믹했으면 좋겠는데 조금은 슬픈 에세이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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