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극동으로 이사 가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어.”
술주정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진지했다. 뇌출혈로 쓰러졌던 때가 대학교 3학년이었다. 지하철로 한두 시간 거리의 학교를 통학하는 것은 본인인 내게도 부모님께도 불편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가족의 대이동이 시동을 걸었다. 결국 2000년 하얀 성탄을 안양 중앙 성당에서 맞게 되었고 무사히 졸업도 하였으며 글쓰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게 되는 기쁨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영광은 내게만 허락된 모양이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나를 대신하여 지옥철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나마 젊은 동생들은 체력으로 견딘다지만 부모님께는 아침저녁으로 당황을 겪으셔야 했을 테다.
게다가 처음 발병한 때는 중2 겨울방학이었다. 당사자인 나도 그렇지만 동생들도 사춘기라는 격동의 바다를 건널 때는 부모님의 관심이 꼭 필요했다. 아픈 손가락인 데다가 첫정인 내게 부모님의 관심이 몰입되었다.
반면에 동생들의 사춘기엔 그 찌꺼기조차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연히 동생과 한의원을 다녀온 엄마는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셨다. 동생이 스트레스로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픈 언니를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엄마의 속상한 마음도 알기에 진퇴양난에 빠진 동생이었다. 그렇게 외롭고 아프게 사춘기를 건너왔다.
또한 막내는 사랑을 독차지해도 모자를 판국인데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다가 이제 안정되려 하는데 이사를 가자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렇잖아도 사춘기를 호되게 보낸 터라 기대어 쉬고 싶은데 그 마음 알아주는 이도 없고, 그래서인지 학교도 정을 붙이지 못했다.
나는 빚이 많다. 관심의 빚을 많이 지고 있다. 동생들에게 돌아갈 사랑마저 모두 차지해 버려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 결핍이 또 다른 부족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동생들아,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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