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 가는 이 즈음이면 문득 가슴 저린 사랑 이야기에 젖어들고 싶어지곤 한다. 이런 날 눈앞에서 툭 하고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은 순정만화 주인공들과 함께라면 실로 완벽하다. 이번 여행지는 한 때 수많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인어공주를 위하여>의 무대, 대구다.
1990년대 순정만화의 대표작 <인어공주를 위하여>
지금은 사라졌지만 인터넷 대중화 시대의 초창기를 장식한 야후 코리아에서는 꽤 재기발랄한 광고를 곧잘 선보이곤 했다. 그 중 하나가 <순정만화클럽> 편인데, 덩치가 산만한 남자가 혼자 만화책을 읽으며 눈물 짓고 있다가 친구들에게 놀림 당한다. 그러자 이 남자는 야후 코리아의 ‘순정만화 클럽’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만난 여성 회원들과의 정모 자리에서 같이 순정 만화를 읽다가 그만 폭풍 오열하고 급기야 그곳의 전부와 함께 울음바다를 이룬다. 조규만의 애절한 발라드 ‘다 줄 꺼야’를 배경 음악 삼아 펼쳐지는 이 광고 속에서 남자가 읽는 만화가 바로 <인어공주를 위하여>다. 1990년대 초중반 우리 순정만화의 대표작으로 꼽는 데에 이견이 없을 이 작품은 이미라의 간판 격인 작품이자 많은 이들이 이름만 들어도 가슴 저릴 푸르매, 이슬비, 서지원, 백장미 등 이미라 월드의 주요 인물들의 상이 정립된 작품이기도 하다.
<인어공주를 위하여>는 한 시기 워낙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어서 당연히 팬들도 많았다. 한 때 하이틴 여학생들에겐 필독서에 가까웠고 누나가 있는 남자들도 곧잘 접했던 작품이다. 대 흥행곡 ‘내 눈물 모아’를 가수 고(故) 서지원도 이 작품의 팬이라서 예명을 지을 때 주인공인 서지원에게서 이름을 따 왔다는 일화가 유명했다. 재밌게도 근래 최고의 인기를 끄는 아이돌 그룹 마마무의 멤버 휘인도 이모가 <인어공주를 위하여> 팬이었던 덕에 작중 인물인 조휘인에게서 이름을 따 왔다고 한다.
시대를 넘어 인기의 흔적들이 대중문화 아티스트들 사이에도 남을 정도라는 건 그만큼 이 작품이 확실하게 한 시대를 풍미했었음을 말해준다. 한데 이 <인어공주를 위하여>는 90년대 청춘의 감성을 듬뿍 담고 있다는 점 외에도 실로 명확한 지역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 받은 작품이었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도시는 1980년대 후반 대구다. 당시 순정만화는 서양을 배경 삼아 서양인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대구라는 지역 도시 속에서 일어나는 일화로 전체를 끌고 나가는 <인어공주를 위하여>는 독자들에게 상당히 독특하게 다가섰다. 실제로 작가는 작품 속에서 표기 상 표준어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구 사투리를 쓰고 있다고 언급해주기도 하니, 독자는 작품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배경지를 끊임없이 환기하게 된다.
<인어공주를 위하여>와 함께 하는 공원 여행
<인어공주를 위하여> 속 주요 배경지 중 슬비네 집과 서지원네 집, 그리고 푸른 고교는 모델이 된 곳을 현 시점에서 특정할 수가 없어 아쉽게도 여행지로 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작품에서 중요한 곳으로 등장하는 공원 세 곳, 특히 그 곳 가운데 두류공원과 달성공원은 <인어공주를 위하여>를 좋아했던 독자들 사이에선 일찍이 일종의 성지순례 코스가 되어 있었기에 이 두 곳만 잘 챙겨도 여행의 반은 돌아봤다 할 만 했다. 장미-지원 관계의 중요 포인트인 망우공원까지 더하면 이번 여행은 그야말로 공원여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인어공주를 위하여> 팬들 사이에서 오랜 성지순례 코스였던 두류공원과 달성공원은 서로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공원이다. “달성공원에 갔다가 오후에는 두류산에 올라가 볼까?”라는 대사를 그대로 따르자면 달성공원을 먼저 갔다가 두류공원으로 이동하면 된다. 두 공원 모두 다행히(?) 전철역이 닿아 초행길이지만 크게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작품 내 시간 속에서는 전철이 아직 없었지만 말이다.
달성공원은 구릉 지대를 이용해 조성한 삼한시대 성곽 자리로 넓게 조성된 공원 곳곳에 수령이 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어 운치를 더하는 곳이다. 대구 시내 공원으로는 가장 오래된 곳으로, 과냐코와 사슴을 비롯해 호랑이, 코끼리, 물개 등 동물들이 다수 있어 비교하자면 서울 능동의 어린이대공원과 비슷한 인상이 있다. 어린이대공원에 비하면 비교적 작은 규모지만 바람 드는 곳에 자리한 누각인 관풍루(지방문화재 자료 제3호)나 옛 토성자락을 따라 조성된 1km 가량의 산책로를 걸으면서 한적한 기분을 만끽하기 좋다.
달성공원은 삼한시대 유적지 위에 자리한 곳이기도 하지만 일제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는 점도 있어서 근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연유에선지 공원 한 편에는 대구의 옛 역사적 흔적을 훑을 수 있는 향토 역사관을 배치해놓고 있고,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동상이 있으며, 공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남순행로에 의미를 부여한 조형물들을 배치해놓고 있기도 하다. 만약 공원 여행이 아니라 대구 자체를 즐기고 싶다면 달성공원 앞 순종 남순행로를 포함해 대구 시내 근대문화유산들을 둘러보는 코스를 잡아 보는 것도 좋겠다.
슬비네를 따라 달성공원 다음에 두류공원으로 가 보니 길을 사이에 두고 놀이동산 E월드와 83타워가 있는 쪽과 공원이 있는 쪽으로 나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입구의 큰 분수대와 더불어 작품 속에선 아직 완공되지 않아 공사 중인 뼈대만 묘사돼 있던 83타워를 길 건너 두류산 자락 저편으로 감상할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두류공원 입구의 분수를 본 다음 두류산에 올라 건너편 아파트를 보며 <인어공주를 위하여> 팬들 사이에서 화제였던 푸르매의 대사 “와아 저 아래 찬장이 잔뜩 있다”를 읊어줘야 하겠으나, 갔을 당시 검색해 나온 두류산 일대는 E월드라는 놀이동산이 돼 있었다. 오로지 대사 하나 외치자고 4만 원 전후의 입장료를 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이 대사를 달성공원 토성길 중간에서 아파트를 보며 외치고 왔더랬다.
막상 돌아와서야 안 사실이지만, 흔히 뭉뚱그려 두류산이라 말하나 대구 사람들은 E월드와 83타워가 자리한 쪽을 두류산이라 말하고 두리봉을 비롯해 성당못 등이 자리한 두류공원 남단의 산을 금봉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대구에 20여 년 전에 한 번 다녀와 봤을 뿐인 사람 입장에선 포털 지도상에는 검색으로도 안 나오는 지명을 어찌 알겠냐 하는 비명이 절로 나오지만, 어쨌든 굳이 고증을 따르자면 작중 슬비와 지원이 지수를 데리고 오른 산은 성당못 쪽의 금봉산 쪽일 가능성이 크다. 먼 곳까지 갔는데 정말 아쉬운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갈 곳은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작품 제목에 걸맞은 진짜 주인공으로 꼽는 데 이견이 없을 백장미와 서지원의 만남 장소로 등장하는 망우공원이다. 작중에서는 이곳에서 장미가 지원에게 바람을 맞기도 한다. 영남 의병의 시작을 알린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해 315명의 의병을 기리는 이 공원은 곽재우 장군의 호인 망우당(忘憂堂)에서 이름을 따 왔다. 이 탓에 표석은 망우공원이라 서 있지만 망우당공원이라고도 한다.
이곳에는 곽재우 장군 동상과 더불어 임란호국영남충의단, 그리고 의병들의 기록을 볼 수 있는 전시관 등이 있다. 전시관에서는 15분 분량의 3D 입체 영상으로 영남 의병의 전과와 의미를 소개하는 영상도 볼 수 있었다. 전시관 앞에서 우연히 만난 전시관 관장님은 그저 지나가던 사람 1이었을 뿐인 내게 임란 당시 왜군이 침입하는 길목에 있었던 영남의 피해가 가장 컸다면서 영남 의병들의 활약으로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는데 역사 속에서 덜 알려졌다며 실로 열띤 강연을 펼치시기도 했다.
망우공원 옆에는 대구 읍성의 남문이었던 영남제일관이 있다. <인어공주를 위하여>에도 망우공원과 함께 백장미가 서지원을 기다리는 장소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본래 대구의 관문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간 날에는 성 누각에 오를 수 없었다.
망우공원과 영남제일관 앞 편으로는 금호강이 흐른다. 포항 즈음에서 발원해 대구를 감고 흘러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이 강은 지원과 지수의 부모님이 합창단을 꾸릴 만큼 아이를 많이 낳자며 행복에 젖던 어느 한 때의 추억을 담고 있다. 이곳에서 엄마는 바람 불 때면 갈대가 가야금 소리를 내서 강 이름이 금호강(琴湖江)이라는 유래를 말하며 “우리 아이들이 자랐을 무렵엔 이 강이 다시 맑아져서 가야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 말한다. 하지만 엄마는 지수를 낳다가 죽고 말았고, 아빠는 그렇게 사랑하던 이를 죽게 한 둘째 지수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 채 자식들과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토록 형아만 바라볼 수밖에 없던 지수는 건널목 저편의 형아에게 간다고 달려가다 그만 차에 치여 죽고, 재가 되어 다시 이 금호강을 따라 흘러갔다. 작품을 보며 눈물지었던 사람들이라면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로 금호강 자락을 바라봄직하다.
그 외의 대구 여행 이야기
<인어공주를 위하여>는 동대구역에서 대구를 영영 떠나는 장미와 그 뒤를 좇는 슬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 때 동대구역의 간판 아래에 적힌 영어 표기가 TONGDAEGU다. 연재 시기를 새삼 다시 떠올리게 하는 대목인데, 작가 이미라 씨는 다른 작품 <사랑입니까>의 부제도 ‘통대구 블루스’라고 지은 바 있다.
재밌는 건 <사랑입니까>에 등장하는 나레이션이 “통대구역, 맛있는 이름”이라는 점이다. 그 표현마따나 지하철 역사들에 대구 음식 맛있다고 알리는 홍보물이 자주 등장했는데, 개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치킨의 성지 대구”였다. 아닌 게 아니라 치킨 프랜차이즈들이 대구를 본사로 삼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실 시간에 쫓기긴 하였으나 이대로 대구를 떠나기엔 아쉬워서 무작정 치킨집에 쳐들어가 30분 만에 치킨 한 마리를 꾸역꾸역 해치우고 나왔다. 아침에 도착하자마자 어쩌다 대화를 나누게 된 동대구역 내 주얼리집 사장님은 대구에 오면 먹어 봐야 할 음식으로 막창을 꼽아주셨는데 막상 업소들에 가 보니 1인 분은 안 팔아서 못 먹었다.
또 <인어공주를 위하여>에서 인물들에게 중요한 장소는 아니지만 회차의 중요한 분기점마다 첫머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배경이 한 곳 있다. 바로 반월당네거리다. 대구에서 한국인이 세운 첫 백화점 이름에서 유래한 이곳은 대구 지하철 노선도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을만큼 중요한 교통의 요지다. 전철 1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며, 달구벌대로와 대구대로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당연히 사람과 차량이 끊임없이 오가는 곳으로 작중에서 슬비와 지원 그리고 장미의 복잡다단한 심정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가 궁금해질 때면 등장하여 주위를 환기시킨다. 작품 속에 주로 등장하는 부감샷은 북서쪽 방향인 14번 출구 쪽의 상공에서 바라보면 나올 만한 곳이나, 현재 그 풍경을 그대로 바라보기 좋을 위치에 자리한 삼성생명 빌딩에서는 아래를 보기도 어렵고 사진 촬영을 허락받지도 못했다. 다만 그 뒤편 동아백화점의 투명 엘리베이터에서 약간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교통편 이야기. 이번 여행은 나 개인으로서는 제주 외의 지역에서 처음으로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해 본 여행이었다. 여행을 거듭할수록 멀어지는 목적지와 기름값을 감당하기 어려워 내린 결정이었는데, 공항 이용료와 유류할증비를 포함해 평일 편도 31,100원에 에어부산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건 KTX보다도 저렴한 가격이다. 물론 공항으로 이동하는 차비와 일찌감치 공항에 닿아야 한다는 시간의 압박을 감안하면 기차가 나을 수도 있으나, 예상 이상으로 저렴한 비용에 짧은 이동시간은 분명 장점이라 할 만 했다. 대구 여행을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리고 출발 시간을 맞출 수 있다면 한 번 비행기를 이용해 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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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를 위하여>(1990)
이미라
만화잡지 하이센스에서 <호두나무가 있는 동화>란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해 이후 제목을 <인어공주를 위하여>로 변경해 만화잡지 나나에서 연재했다. 개그와 진지함 그리고 눈물샘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애절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1990년대 초중반 한국 순정만화의 대표작. 섬세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장치들이 깊이 있게 녹아 있어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오랜 전월세 생활 끝에 단독 주택을 마련해 이사 온 만화가 집 막내 이슬비는 고교생으로 어린 시절의 인연인 푸르매와 혼인하기로 약속한 사이. 멀리 떨어진 채 어느덧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약속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한데 슬비는 새로 전학 온 푸른 고교에서 ‘명물’로 일컬어지는 서지원을 알게 된다. 서지원은 불량 서클의 리더로 신기하게 성적이 나쁘지 않아 학교에서도 어쩌지 못하는 존재. 그리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부잣집 딸 백장미는 사고로 자기 발을 망가뜨려 유급의 원인이 된 서지원을 좋아해 발을 빌미로 안타깝고도 위험한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다.
한편 지원에게는 단 둘이 사는 동생이 있다. 슬비는 우연찮게 챙겨주다가 지원과 엮이는 일이 잦아지는데, 그 과정에서 마냥 불량하기만 한 줄 알았던 지원에게서 의외의 일면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지원에 대한 경계가 살짝 놓인 순간, 지원은 푸르매와 슬비만이 알고 있을 어떤 말을 툭 던져놓는다. 충격을 받은 슬비, 과연 이야기의 향방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슬비와 지원을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발을 다친 채 슬픈 사랑을 하고 있는 장미야말로 제목이 가리키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 속 인물 구도의 흥미로운 점이다. 나나코믹스 브랜드로 9권 완결됐으며 2000년 시공사에서 재판하였으나 현재는 절판, 현재는 네이버N스토어를 통해 전자책으로 73회차 전편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