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경도 안전 다음!
가을하면 단풍, 겨울 하면 눈꽃. 산은 이 계절이면 한층 빼어난 정취로 등산객을 유혹한다. 하지만 산은 아차 방심하는 순간 표정을 무섭게 바꾸는 곳이기도 하다. 산을 찾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 요즘 강조에 강조를 거듭해도 모자람 없는 것이 바로 안전. 이번 여행지는 산에서 사고가 나면 달려가는 산악구조대원들의 이야기, <피크>의 무대인 북한산이다.
산에서는 첫째도 둘째도 방심 금물! 산악구조액션 웹툰 <피크>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7할이 산지일 만큼 산이 흔한 나라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이름 있는 산들은 유난한 사랑을 받는다. 그 가운데에서도 북한산은 세계에서 드물게 수도에 걸쳐 있는 국립공원의 중심이자 서울 근교의 가장 높은 산으로서 오랜 시간 이 나라의 중심을 지켜봐 왔다.
한데 북한산은 서울 근교 산들 가운데에서 가장 산악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단순히 생각하면 북한산에 사람이 제일 많이 가기 때문에 사고도 많은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 지역 사이에서도 3할에 가까운 사고율은 단지 사람 수만으로는 설명이 안 될만큼 유난하다. 아닌 게 아니라 바로 저 “그래 봐야 1000m도 안 되는데~”라는 방심이 그 1000m도 안 되는 산에서 목숨이 오가는 아찔한 사고를 만든다.
<피크>는 바로 이런 북한산에서 일어난 산악 사고를 수습하고 부상자를 구조하는 역할을 하는 북한산 경찰 산악 구조대를 주인공으로 삼은 만화다. 제목인 피크(PEAK)는 젊음의 절정기에 입대한 주인공들을 비유한 표현이자 산봉우리, 산 정상을 뜻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북한산 경찰 산악구조대는 같은 북한산 국립공원 내 도봉산 쪽의 구조대와 더불어 모두 현역 군인 신분으로 이뤄져 있다. 작품의 도입부에는 실제 일어난 조난사고인 1983년 4월 3일의 대학 산악부원 사망 사고가 등장하는데, 그해 서울 경찰청에서 북한산과 도봉산 두 곳에 산악구조대를 설치하여 막 입대한 청년들을 5명씩 차출해 배치해 오고 있다.
전기는 태양광에 의존하고 샤워는 근처의 작은 폭포에서 해결할 만큼 열악한 환경인데 인명 사고는 언제나 부지불식간에 터져 나온다. 이러한 곳에 엉겁결에 산악구조대원으로 차출되어 온 다섯 젊은이가 선다. 구조대라는 특성상 산악 사고 앞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들을 마주하며 류연성을 비롯한 일원들은 점차 햇병아리에서 점차 어엿한 구조대원으로 성장해간다. 하지만 이들은 점차 산이 주는 무거운 무서움도 깨달아간다.
무용수였다가 도망치듯 입대한 류연성을 비롯한 구조대원들은 각자 사회생활 속에서 얻었던 상처들을 끌어안은 채 산악구조대라는 조금 더 독특한 자리에서 만났다. 이들은 산에서 만난 수많은 사건사고들 속에서 점차 구조라는 행위의 본질, 생명, 산을 대하는 자세 등을 몸으로 깨닫게 된다. 류연성과 북한산이 얽힌 인연은 여타 인물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데, 바로 북한산 산악구조대 창설의 계기가 된 사고의 희생자와 연관이 있다.
만화 <피크>가 유난히 많은 찬사를 받았던 것은 압도적인 리얼리티 때문이다. 인물도 멋있고 산을 더할 나위 없이 잘 표현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작품의 스토리 작가 홍성수 씨가 바로 이곳 구조대 출신이라 가능한 묘사와 설정들이 작품 전체에 꼼꼼하게 박혀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덕목은 바로 이러한 리얼리티가 전달하는 강렬한 메시지에 있다. 작품은 주인공들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왜 이 상황이 벌어졌는가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사고는 생명이 오가는 문제고, 사고가 일어나는 상당수 원인은 방심 때문이라는 점을 말이다.
만화 속 코스를 따라 백운대로 가다
만화 속에서는 암벽 등반도 나오지만, 나는 얌전히 그리고 당연하게 발로 닿을 수 있는 곳을 오르기로 했다. 그리하여 선택한 코스는 서울 우이동 쪽에서 올라 백운대로 가는 코스다. 이 코스는 류연성을 비롯해 <피크>의 구조대원들이 입대 후 차출되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차에 실려 도착했던 삼각산 도선사 광장에서부터 시작해 백운대로 향하는 등산 경로다.
우이동~백운대 코스는 서울 쪽에서 북한산을 오르는 이들이 택하는 대표적인 경로로 북한산성 코스나 사기막골 코스보다 짧다. 비교적 짧은 거리에 산 높이도 836.5m로 아주 높지는 않으니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만만해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 올라보니 제일 짧은 코스조차 난도만은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보다 오히려 높게 느껴질 정도였다. 작중에서 사고 원인을 두고 단지 사람이 많아서만이 아니라 산이 살아 있는 듯 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는 대사가 등장하는데, 산에 인격을 부여하는 단계까지 갈 것 없이 길 자체가 시종일관 털끝만큼도 너그럽질 않았다. 눈이나 비가 안 온다 해도 일교차가 커지는 간절기엔 낙상사고를 일으키기 쉬운 조건이 아주 끝도 없이 좁은 길의 형태로 늘어서 있었다. 이런 길을 ‘구조대로서의 산행’을 흉내 낸답시고 산길을 마구 뛰어다니다간 그야말로 속절없이 구조대에게 구조 받을 처지에 놓일 것만 같았다.
그나마 위안인 건 물리적인 길이가 그래도 짧은 편인지라 사고를 겪지 않는 이상 힘들다 싶은 타이밍에 볼거리들이 마련돼 있다는 점이다. 우이동~백운대 코스를 오르다 보면 만화 속 배경지 상당수를 직접 통과하거나 구경할 수 있는데, 작중 주인공 일행이 처음 산 입구 밑에 도착해서 만난 도선사 광장의 기묘한 불상부터 시작해 하루재, 산악구조대 초소, 백운산장 등을 차례차례 만날 수 있다.
작품의 의미를 생각하며 산을 오르다 보니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장면들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이를테면 산 입구에 붙어 있던 펼침막에 적힌 ‘안전만큼 중요한 건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그러했고, 등산로 곳곳에 박혀 있던 현재 위치 번호가 그러했다. 곳곳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가 붙어 있던 곳들도 마찬가지였다. 게임 속 맵에서 꼭 가지 말라거나 못 갈거라 생각한 곳을 비비고 들어가는 기괴한 습성이 있는 게 한국인이라지만 현실서 그러다간 정말로 구조대를 부르는 사태를 일으킬 것만 같았다. 방심하지 말자, 까불지 말자,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이 우선이다. 어느 순간엔가 나는 작품을 떠올리며 내내 이 말들을 읊조리며 움직이게 됐다. 어떤 면에선 배경 이상으로 이 작품이 주는 중요한 효과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다짐과는 달리 아무 생각 없이 신고 온 신발이 밑창이 닳아 있어서 시종일관 미끄러지다 급기야 철주난간 밑둥에 발이 찍혀 피멍이 들기도 했다. 본의는 아니어도 결과적으로는 이 작품을 알고 갔음에도 출발하기 전까지 산을 우습게 본 셈이었다.
하루재는 넘는데 하루가 걸리는 고개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 말대로 하루가 걸리는 곳은 아니었으나 다른 의미로 굉장히 즐거운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마침 내가 북한산에 오른 때가 10월 19일로 가을이 막 깊어지기 직전쯤이었는데, 산에 오르기 전 물과 초콜릿을 구입하기 위해 들른 편의점의 점장 아주머니께서 혼자 왔다는 말에 “마침 잘 왔네, 지금 중간 정도까지 단풍이 내려와서 제일 좋을 때야. 지나면 별로야”라는 말을 건넸다. 들을 때는 별 생각 없었으나 하루재 즈음에 오니 그게 무슨 뜻이었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간 날이 평일이기도 했지만 단풍으로 완전히 덮일 때만큼 등산객으로 북적이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색이 반반 섞여 오히려 한층 다채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하루재에서 산악구조대 초소 겸 현 인수대피소 방향으로 150여m 정도 간 위치에서는(37°39'44.3"N 126°59'07.8"E) 우리나라 암벽등반가들의 시작점이자 바위의 어머니라는 인수봉이 아주 좋은 거리와 크기로 보였다. 인수봉은 발 닿는 곳에서 올려다 볼 수 있는 백운봉암문(위문) 근처에서 보면 너무 크고, 멀리서는 너무 작고, 백운대에서는 아래로 보인다. 만약 인수봉을 더 멋있게 감상하고 싶다면 하루재에서 조금 더 올라가 보길 권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산장이라는 백운산장과 그 주변에도 볼거리가 많다. 백운산장 앞마당에는 작중에도 고스란히 묘사돼 있지만 ‘백운의 혼’이라는 탑이 있다. 백운의 혼 추모탑은 한국전쟁 발발 나흘째인 1950년 6월 28일 이곳 남아 있다가 서울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고 자결한 두 군인을 추모하기 위해 한넝쿨산악회와 홍지회가 건립한 탑으로 한넝쿨산악회와 백운산장에서 관리하고 있다. 백운산장은 손기정 선수가 직접 썼다는 현판부터 시작해 94년이라는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곳이었다. 작중 얼마 없는 여성 캐릭터 중 한 명이 이곳에서 일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는데, 실제로는 3대째인 이인덕 씨 부부가 계시다. 2대 산장지기였던 이영구 옹이 올 9월 초 돌아가셨다고 한다.
2층에는 숙박이 가능한 공간이 있는데 작중 구조대원들도 훈련 도중 이곳에서 비를 피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북한산에서 큰 사고가 나면 사실상 구조본부 역할을 하기도 했던 곳이다. 산악인들의 자취가 곳곳에 묻어 있는 이 산장에서는 현재 국가 귀속에 반대한다는 서명을 받고 있기도 하다. 산악인들은 백운산장의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수익사업용 숙박시설이 된 여타 국립공원 대피소의 사례를 들어 반대하는 입장인 모양이었다. 그런 연유로 지도에는 공식 명칭을 국가시설물인 ‘백운대피소’라 표기하지만 산악인들에게 백운산장은 그저 백운산장일 뿐이다. 참고로 산장에서는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데 역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메뉴는 컵라면이다. 가격은 2500원으로 카드는 안 되고 현금 또는 계좌이체로 구입할 수 있다.
여느 큰 산이 그러하듯 마지막 산장(내지는 대피소)을 넘어서면 산세가 조금 더 공격적이 된다. 대피소에서 고양 쪽에서 넘어온 등산객들과 만나는 백운봉암문까지의 거리는 그리 길진 않지만 가파름은 한층 더 심하다. 위문과 더불어 이 높다란 곳에 쌓은 북한산성의 위세에 잠시 놀란 것도 잠시, 양쪽을 보면 이제 북한산의 원래 이름인 ‘삼각산’의 유래인 세 봉우리가 보인다. 만경대와 인수봉을 양쪽에 놓고 앞을 보면 이제 정말 까마득한 경사 위에 백운대가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곧바로 실족사고로 이어질 만큼 난도가 높았다. 철주난간을 부여잡고 거의 팔 힘으로 몸을 튕겨 올리듯 올라갔다. 이 마지막 경로는 암벽등반가용이 아닐 뿐이지 위에서 누구 한 명만 발을 헛디디면 곧바로 여러 사람이 낙상사고를 당하기 아주 좋은 형태였다. 그래서일까 이 산은 정말이지 절로 겸손함과 양보를 배우게 한다. 만만하게 보면 절대 너그럽지 않을 것이며, 앞에서 내려오는 이에게 양보하지 않으면 서로 다칠 것이다. 그 즈음까지 도달한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다렸고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어렵사리 백운대에 오르니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N서울타워와 잠실의 제2롯데월드까지도 아래로 보일만큼 높다란 자리다. 인수봉과 만경대에는 암벽등반가들이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바위 위를 오르고 있는 풍경도 보였다. 작품에서는 시즌2 2화에서 선배 기수가 제대하던 날 대원 전원이 이곳에 올랐다. 대원들은 이제 선배들이 나간 자리에서 오로지 자신들만으로 산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 선다. 그 생각을 헤아려보며 정상 바로 아래의 널따란 바위에 몸을 뉘여 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어쨌든 서울 주변에선 가장 높은 자리에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이고 누웠다.
물론 내려갈 길은 까마득했고 밑창 사정 때문에 한층 더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지만, 등산은 하산까지 안전히 마쳐야 끝난다는 점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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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PEAK)>
홍성수 글, 임강혁 그림. 미디어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절찬리에 연재된 작품으로 2011년부터 2014년까지 3년에 걸쳐 시즌 7까지 진행된 끝에 완결되었다. 산악구조액션이라는 카피가 있지만 그보다는 산에서 구조 당하는 신세가 되지 말자는 캠페인 만화가 아닐까 싶을 만큼 구조 과정과 사고의 위험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리얼리티가 뛰어난 작품으로, 모 아웃도어 용품 업체의 PPL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단행본은 7권으로 영상출판미디어에서 완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