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짜에서 자신을 찾으라던 칼잡이의 길을 좇아
한 때 한 유명 라면 광고에도 등장했던 말이 ‘안성맞춤’이다. 뭔가가 딱 맞춘 것처럼 들어 맞을 때 쓰는 표현으로, 안성에서 유기(鍮器, 놋쇠그릇)를 주문하면 맘에 딱 맞게 왔다 하여 붙은 표현이다.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주인공 견자의 삶에 스승 황정학과 더불어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는 유기 장인이 있는 곳도 바로 이 안성이다. 만화 속 깨달음의 흔적을 좇아 안성으로 발길을 옮겨 보았다.
한계 속에서 추구하는 자유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내 파란 세이버>를 그린 박흥용이 1996년 낸 작품이다. 조선 선조 대를 무대로 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 한견주는 기생과 만석꾼 사이에서 난 서출로 ‘견자’(개자식)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신세다.
천한 출생이라 벼슬길에 나설 방법 자체가 없음에 노상 울분과 한탄에 글월 읊는 서생들을 괴롭히기나 하며 살던 견주는 어느 날 맹인 황정학과 만나게 된다. 황정학은 장님이지만 오히려 누구보다도 세상을 훤히 바라보는 눈을 지니고 있던 침구술사이자 명성이 자자한 검객. 견주는 한계를 한탄하기만 하던 자기와는 달리 한계 안에서 더없이 자유로워 보이던 황정학의 모습에 반해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집을 나서게 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벼슬’이라는 닿을 수 없을 목표를 두고 괴로워하던 견주가 황정학과의 여정을 통해 점차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신분과 욕망과 열등감을 스스로 베어내고 자유로워져 가는 모습을 그린다. 철벽 같이 강고한 성리학과 신분제의 나라 조선에서 책으로는 닦을 수 없었던 견주의 길은 어느덧 세간에 알려진 견자라는 이름으로 닦여 가게 된다.
불덩이 같던 열망과 열등감은 어느덧 진짜 기회가 눈 앞에 올 때 스스로 권력 앞에 어떤 입장일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입장으로 바뀌어간다. 하지만 그런 견자 앞에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이 닥치고, 또 그 틈을 타 역시 서자라는 신분적 한계를 자기 칼로 뒤집어 엎어 보려는 이몽학이 난을 일으킨다. 한계에 맞닥뜨렸고, 칼을 손에 쥔 입장이란 점에서 이몽학과 견자는 서로 비슷해 보이는 처지지만 이 둘이 자유하고자 하는 방법과 방향은 정반대로 갈린다. 작품은 어느 쪽이 정답이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극명히 다른 두 길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단지 옳고 그름의 차이 이전에, 자기 자신이 끌어 안고 있는 고집과 아집과 자존심을 죽여 없앰으로써 얻는 자유가 있다. 황정학이 그러하였고, 이제는 견자가 그러하듯이.
마치 구도자의 질문과 답과 같은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던지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1996년 대한민국 만화문화 대상 저작상을 수상한 데 이어 영화 <왕의 남자>를 만든 이준익 감독의 손으로 2010년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견자의 구도길을 따라, 안성으로 향하다
주인공 견자에게 스승 황정학과 함께 중요한 가르침과 방향성을 전하는 인물이 바로 이 안성에서 방짜유기를 만드는 장인이다. 황정학이 높은 분 자제로 태어났지만 장님이라 항아리에 숨어 자라야 했듯, 방짜 장인은 안성 바닥에서 장인 중 장인으로 소문이 자자하면서도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왕실 제기를 만드는 일꾼을 뽑는 데에 제외되어 작업장에 홀로 남았다.
눈 먼 장님이 조선 최고의 칼잡이가 되고 노비의 자식이 최고의 방짜쟁이가 된 모습을 본 견자는 ‘지독한 열등이 지독한 열성을 만드는’ 지점을 조금씩이나마 깨달아간다. 황정학은 스승으로서 견자에게 가야 할 길을 방짜에 빗대어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윽고 다급히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황정학은 친구인 방짜 장인에게 주문 하나를 넣는다. “몇 년 후에 돌아올지 모르지만 우리 곧 돌아올 테니까 이 미친놈 칼 하나 만들어놓게” 세상에 나가고 싶지만 나갈 수 없어 몸부림 치던 한견주가 언젠가 받아 들 목표점이 생긴 것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안성은 극 전체를 아우르는 무대는 아니지만 이렇듯 주인공이 닿아야 할 깨달음의 시작점이자 큰 목표점을 안고 있는 곳으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번 여행은 ‘안성맞춤’이라는 표현의 유래이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의 유기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을 목적지로 삼아 보았다.
안성에서 유기를 본격적으로는 소개하는 곳으로는 크게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입구 즈음에 자리하고 있는 안성맞춤 박물관, 그리고 다른 한 곳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보유자 김수영 선생이 아버지인 제77호 유기장 명예 기능 보유자인 고 향원 김근수 선생(1916~2009)의 유지를 받들어 설립한 안성마춤 유기 박물관이 그곳이다. 참고로 ‘안성맞춤’이 표준어지만 안성시가 시를 대표하는 5대 특산품을 꼽으며 브랜드를 만들 때엔 고유명사를 쓸 수 없어 새로이 내세운 이름이 바로 ‘안성마춤’이다.
먼저 안성맞춤 박물관은 안성시가 2002년 세운 시립 박물관이다. 유기 전문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안성의 유기와 특산물, 그리고 역사와 향토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세운 곳이지만 가장 첫머리로 소개하는 전시물이 바로 유기일 만큼 높은 유기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 안성은 수공예 생활 용품이라 할 수 있는 놋쇠 제품의 주 생산지로서 조선 중기 이래 이름 높은 고장이었다. 해설사분에 따르면 조선 대에 들어 구리와 주석을 섞어 놋쇠 그릇을 이용하면 식중독에 잘 걸리지 않음을 알게 되어 유기만큼은 신분을 막론하고 널리 쓸 수 있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건강을 챙겼다고 한다.
하지만 전시되어 있는 그릇에서도 보이듯 왕실에서 쓰는 놋그릇은 형태와 모양도 과연 차원이 다른 멋을 풍기고 있었다. 박물관에는 왕비도 쓰지 못하고 오로지 임금만 쓸 수 있었던 유기가 전시돼 있었다. 굉장하다는 감상과 더불어 작중에서 왕실용 유기를 만드는 데에도 노비 자식은 부르지 않았다던 일화를 생각하면서 기분이 몹시 복잡 미묘해지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왕실 안팎은 물론 백성들 사이에서도 널리 쓰였던 유기들이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전쟁 준비로 구리를 필요로 한 일본 때문에 공출되는 바람에 많이 사라지고, 유기 공장도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전통 유기는 스테인리스 제품이 유행을 타면서 한동안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지만 근래 들어서 건강 이슈가 부각되면서 다시금 유기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는 주로 망치로 두들겨 만드는 방짜 유기가 나오지만 놋그릇에는 놋쇠를 녹여 부어서 만드는 주물 유기, 그리고 두 방식을 섞은 반방짜유기 방식으로 나뉜다.
안성은 조선 3대 장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이었다. 유기 또한 이러한 배경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유통될 수 있었고, 문화적으로도 바우덕이로 대표되는 안성 남사당이 전국 단위로 유명할 만큼 풍성한 곳이었다. 한데 일제강점기 당시에 수탈을 위해 일제가 가설하던 철도를 억청스레 막아섰던 결과 해방 이후에 오히려 도시로서의 성장이 더딘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해설사분은 독립 운동과 유관순 하면 충남 천안을 먼저 떠올리지만 안성의 독립운동과 항일 의지가 사실은 식자층을 넘어선 민중 단위까지 포괄해 제일이었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천안 출신인 입장에서 약간 식은땀이 나는 열변이었지만, 그만큼 안성이 애향과 항일, 그리고 장인정신의 고장임을 강변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한편 전시물 가운데에는 안성에서는 처음으로 외세에 점령당했던 죽주산성에서의 전투 장면을 인형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재현한 장면은 복개전차대라는 이름으로 소가 끄는 수레에 짚을 가득 채우고 불을 붙인 채 돌격시키는 전투였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쓰인 방식이었다고 한다. 박흥용 작가가 알고서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금강산으로 몰려온 왜군을 견자가 지휘한 산적 무리가 몰살시킬 때 쓴 방식과 매우 흡사해 흥미로웠다. 작품을 읽은 이라면 유기와 더불어 눈여겨 볼 만한 장면이라 하겠다.
안성맞춤 박물관이 시영 박물관이라면, 안성마춤 유기 박물관은 사설 박물관이다. 현 제77호 유기장 보유자 김수영 선생이 관장을 맡고 있는 이곳은 판매처를 겸한 유기 공방 뒤편에 별도 건물로 자리하고 있다. 고 김근수 선생이 아들인 김수영 선생과 함께 오랜 시간에 걸쳐 모아온 자료와 물품을 모아놓은 곳이다.
사설 박물관임에도 1층부터 3층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큰 규모로 충실하게 구성돼 있었으며, 유기를 전문으로 한 구성과 규모로는 오히려 시영 박물관과도 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훌륭했다. 관계자분의 추천에 따라 3층에서부터 거꾸로 감상하며 내려왔는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견자가 머물며 숙제를 풀며 몸을 쓸 때 등장한 도구들을 떠올리며 감상해 보니 왠지 모르게 절로 함께 철학적인 고민을 품게 될 것만 같다. 정말, 한계란 무엇이고 껍데기는 무엇이며 이를 벗어 던지고 나를 찾는다는 건 또 무엇일까?
이몽학 토벌에 공을 세운 자의 흔적을 찾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견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인 이몽학은 실존인물이다. 그것도 역적이어서 역사 기록에서는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을 수 없는 인물이다. 왕족의 서얼 출신으로 아비에게도 쫓겨나 충청도 홍성 쪽을 거점으로 삼아 움직였다고 기록돼 있는데, 만화에서는 견자가 찾는 방향성에 상대성을 지닌 인물로 묘사하려다 보니 입술도 두껍고 잘 생겼다고는 차마 말은 못할 견자에 비해 매우 호남형으로 그려져 있다. 영화판 배역도 차승원일 정도로 멋있게 묘사된다.
실존 인물 이몽학은 부하에게 목이 잘려 무덤조차 없고 심지어 청양에 있는 조상 묘는 묘의 목이 되는 곳까지 끊겼다. 한데 이몽학과 연결점을 지니는 곳이 안성을 떠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홍계남 장군의 고루비다. 1597년 34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홍계남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로, 해당 비석은 당시 싸움터였던 자리에 서 있다. 홍계남 장군은 왜란이 잦아들기도 전에 터진 이몽학의 난(1596) 당시 반란을 평정하는 데에도 공을 세웠지만 반란 주모자 중 하나가 “홍계남, 김덕령, 곽재우는 우리 편”이라는 소문을 냈던 일로 반란이 끝난 후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가 무고로 결론 나 풀려난 일이 있다.
실상은 열등감이라면 조선 역사 속 팔도 전원을 통틀어서도 수위에 꼽힐 선조의 못난 성정이 의병장들을 향하며 빚어진 일이고 심지어 그 중 김덕령은 고문 끝에 끝내 옥사하고 만다. 홍계남은 가까스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병으로 죽고 마는데, 훗날 영조가 1745년 장군의 전공을 기려 비석을 세우니 이것이 홍계남 장군 고루비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돼 있으니 유기 박물관을 둘러본 뒤 한 번 들러봄도 좋을 듯하다.
■ 작품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박흥용 작
애장판 1~3권 완결
바다그림판 출간, 각권 7,800원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010년 개봉 / 111분
황정학(황정민 분), 이몽학(차승원 분), 견자(백성현 분), 백지(한지혜 분)
■ 장소 가는 길
시립 안성맞춤 박물관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서동대로 4726-15 (중앙대학교 안성 캠퍼스 입구 안쪽)
031-676-4352
안성마춤 유기공방/박물관
경기도 안성시 중앙로 452
031-675-2590
홍계남 장군 고루비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구수리 산87-1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