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만화유산 답사기> 못 다 한 이야기 (2)
제 2018년 3월 출간작 <나의 만화유산 답사기> 중 분량 초과 문제로 다 싣지 못한 내용들을 마저 소개합니다.
이승만과 남산
중정과 안기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니 이승만과 남산이 그리 연이 없다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승만은 광복 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올랐으나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25m짜리 자기 동상을 세웠고(1956) 일제에게 인왕산으로 쫓겨난 국사당을 제 자리에 돌리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자기 아호를 딴 ‘우남정’을 세웠다(1959). 남산과는 상관없긴 하지만, 임금의 자리였던 경복궁 경회루에는 역사와는 상관없는 개인 낚시터 하향정을 세워 아내와 놀기도 했으니 이승만이 추구하던 것이 임금, 황제와 같은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승만은 종신 집권의 야욕을 불태우다 3·15 부정선거(1960)를 저지른 끝에 4·19혁명(1960)을 맞아 하야 성명을 내고 쫓겨난다.
4·19 이후 이승만 동상은 철거됐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를 죽기 3년 전 동상이 섰던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함께 묶어 “남산은 살아 있는 자의 동상을 용납하지 않았다”라 촌평한다(한겨레21 제777호 「돌아온 산, 남산」 중). 한편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은 팔각이 오래도록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도형이었다면서, 이승만이 국사당 자리에 팔각 정자를 지어 자신의 아호를 붙임으로써 신성을 부여하려 한 것에 관해 “빨리 죽어 귀신이 되라는 뜻일 수도 있음을 알기는 했을까”라 말하기도 한다. (전우용, 『서울은 깊다』 중) 우남정은 4·19혁명 때 이승만 동상과 함께 철거됐고 1968년 11월 11일 같은 자리에 남산 팔각정이 들어선다.
한편 이승만 정권은 자기 동상을 세워놓은 조선신궁 터를 국회의사당 신축부지로 선정(1958)해 1959년 5월 15일 기공식도 열었으나, 박정희가 군사정변(1961.05.16)을 일으키며 백지화했다. 이 당시 국회의사당 설계 현상 공모에 당선됐던 사람이 이후 세운상가를 설계한 건축가 고 김수근의 팀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세운상가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의 여덟 번째 꼭지에서 조금 더 다루도록 하겠다. 조선신궁 터에는 지금 안중근 의사 동상과 백범 김구 선생 동상이 들어서 있다.
<도판 설명> 대한뉴스 제279호(1960.08.30)에서 보도된 남산의 이승만 동상 철거 뉴스. “서울 시내 남산에 있던 독재자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이 철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상은 지난날 자유당 간부들에 의해서 근 2억환이나 되는 막대한 돈을 들여서 세워진 것인데 이 육중한 동상이 높은 좌대로부터 땅에 떨어질 때는 독재자의 말로를 풍자하는 극적인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퇴임하고 불과 몇 달 사이의 극단적 평가 차이가 신선할 정도다. 1960년 기준으로 100환이 현재 10원에 해당하므로 건립 당시 2천만 원 정도의 예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16년 화폐가치로는 약 7억3천만 원 가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