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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Nov 26. 2020

단테 <신곡-연옥편>

단 고통과 풍족한 궁핍

단 고통과 풍족한 궁핍

2019년 10월 13일 씀



 고통이, 지옥에서는 형벌로써 가해지지만 이 곳 연옥에서는 죄를 탕감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고결하고 복된 장소로의 걸음을 딛기 전, 응당 오만/색욕/탐욕/폭식/질투/나태/분노의 죄를 반성과 회한으로 말끔히 씻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분위기야 한결 누그러졌지만서도, 연옥의 군상들은 지옥의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고통에 신음한다. 그럼에도 지옥은 물론이거니와 현세보다도ㅡ구원을 ‘희구’하며 묵묵히 신께서 주신 소명을 수행해나가는, 지금 내가 사는 이 세계ㅡ ‘보장’된 천국을 고대하며 고통마저 기꺼이 달게 여길 수 있는 연옥이 훨씬 더 나아보인다.

 대학 시절 역사를 배울 때, L교수님 특유의 교수법(역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음악, 그림,  책 같은 걸 함께 가르쳐주시는)에 또 나 특유의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더해서, 오른손에 쥔 볼펜을 주먹도끼로- 성경책으로- 그리고 정치 이념으로- 교체해가며 마치 그 시대의 사람이 된 듯이 즐겁게 공부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예술과 용맹한 기사의 시대, 중세가 내게는 가장 큰 난관이었다.   

 난방이 안 되는 성에서 오들오들 떨며 잠드는 봉건 영주와 토실토실한 돼지를 끌어안고 잠드는 농부의 처지를 재미있게 비교해 떠올려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 모든 것의 기저에 깔린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지 않고는 중세인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때 교수님이 강의 중 잠깐, contemporary 단어를 쪼개서 보여주신 것이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contemporary는 ‘동시대의’, ‘당대의’로 번역된다. (사전에는 ‘현대의’라고도 나오지만, modern하고는 조금 다르다.) 이걸 con + temporary로 쪼개면 con-(together with)과 temporary ‘임시의’가 된다. 궁극은 내세에 있으므로, 현세는 임시로 여기는 태도가 이렇게 단어 속에도 숨어있다고 웃으며 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저 ‘임시’라는 말을 듣자마자 수수께끼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자발적으로 스스로에게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하고, 사랑의 신의 이름으로 기꺼이 이교도를 처단할 수 있는 힘은 모두 내세의 고귀함을 드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고시를 준비하던 친구는, 머리를 질끈 묶고 슬리퍼를 끌며 부시시한 모습으로 공부하고 있는 지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열정의 결과로써 당당하게 합격한 미래 자신의 과거를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연옥에서의 고통은 당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라고 해야 옳을 지도 모르겠다.

/

 
 (발췌)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언짢은 듯 보였다. 아, 고귀하고 깨끗한 양심이여, 하찮은 허물조차 당신에게는 쓰라린 후회로군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한 귀퉁이에서, 나는 아래와 같은 문장을 발췌해둔 적이 있었다.

 ... 그건 어느 의사가 오래 전에 내게 들려준 이야기와 똑같군요. ... 그는 나이가 지긋하고 대단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 말하기를,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공상을 할 때는 흔히 인류에 대한 지극한 봉사 정신에 빠져 들기도 하고, 만일 갑자기 그럴 필요가 생긴다면 사람들을 위해 실제로 십자가를 걸머지겠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단 이틀도 같은 방에서 어떤 사람하고든 함께 지낼 수 없으며, 이것은 내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바이다. 어떤 사람이 나와 가까이 있게 되면, 그의 개성은 바로 나의 자존심을 짓누르고 나의 자유를 구속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하루만 지나면 나는 그를 증오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식사 시간에 너무 오래 먹는다는 이유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은 감기에 걸려 계속 코를 풀어댄다는 이유 때문이다. 일단 나를 아주 조금이라도 건드리게 되면 나는 사람들의 적이 되고 만다. 그래서 개별적 인간을 증오하면 할수록 인류에 대한 나의 보편적 사랑은 한층 타오르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

 2016년 12월 8일, 나는 저 페이지를 찍은 사진 아래에다 이렇게 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스스로에게서 감지해 낼 수 있는 인간은, 제 아무리 개별적 인간들을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미워하게 되더라도, 애초에 저런 보편적 사랑을 인지조차 못하는 인간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인 것이다. 여타의 인간들에게는 자명하고 합당한 혐오의 사유가 저들에게는 스스로의 가치관을 뒤흔들며 괴로움을 주는 고민과 자기 반성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미워함을 부끄러워할 줄 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야말로 인간의 품위를 구성하는 주재료다. 네이버 웹툰 ‘덴마’의 ‘만드라고라’ 챕터에 나오는 아름다운 나오미 수녀님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


 (발췌) 오만한 그리스도인들이여, 가엾은 자들이여, 너희 마음의 눈은 병이 들어 뒤로 가는 발길에 아직도 믿음을 두고 있구나! / 우리는 유충들, 최후의 심판을 향해 온전히 날아갈 천사 나비가 되기 위해 태어난 유충들임을 모르는가!

 (발췌) 죽음으로써 비로소 벗어날 육신에 아직 싸인 채 나는 천국으로 오르고 있소이다. ... 하느님께서 뜻하신 특별한 은총을 받은 나는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으신 방법으로 그분의 궁정을 보게 될 것이니. ...

 순례자의 태도가 변모한 것이 돋보였던 부분. 비와이의 <아들이>라는 랩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신의 위대한 계획에 합당한 존재는 나뿐’

 (발췌) 따라서 사람들은 법률의 구속을 필요로 하며 적어도 진정한 도시의 탑을 구별할 수 있는 통치자가 필요한 것이지요. 진정, 법은 있소. 그런데 누가 법을 지키고 있소? 아무도 없소. 앞에서 이끄는 목자는 되씹기는 하지만 갈라진 발굽은 가지지 못했소. 사람들은 저들의 목자가 저들도 탐을 내는 속세적인 재화를 탐하며 그것을 먹고 사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아시다시피 세상을 혼란하게 했던 원인은 사람들의 썩어 빠진 본성이 아니라 잘못된 통치였소.

 (발췌) “하느님의 천사다. 우리가 부탁하기도 전에 오를 길을 보여 주러 오셨다. 자기 빛으로 자신을 감추시는 그 분은 / 사람이 사람을 대하듯 우리를 대하신다. 다른 이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먼저 요청해 오기를 기다린다면 이는 벌써 반쯤 거절한 것과 같음이라. ...”

 (발췌) 거의 한밤중이지만, 달이 마치 불에 달군 양푼처럼 빛나 눈으로 볼 수 있던 별들은 희미해졌는데

 뭐어, 불에 달군 양푼처럼 빛났다고? 이런 걸 읽으면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발췌) 인류의 첫 시대는 황금처럼 아름다웠다. 배고픔은 도토리를 맛있게 했고 목마름은 어느 냇물에서든 단물이 흐르게 했다. 메뚜기와 꿀은 광야에서 세례자를 먹여 살린 음식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복음서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가장 영광되고 가장 위대하다.

 올초에 바꾸었던가, 내 인스타그램 프로필은 이렇다.
‘일상의 갖가지 속재료들이, 저마다의 적절한 궁핍과 적절한 풍족으로 균형을 이루는 삶.’

 나는 약간 조바심이 있는 편이라, 차분하고 느긋한 성품을 부러워했다. 그걸 위해서는 적어도 ‘충분’해야하고, 또 ‘풍족’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알찬 여행을 위해서는 꼼꼼히 준비해야하고, 동료들에게 먹을 걸 나눠주려고 마음 먹었다면 팀원들 숫자보다 하나 더 준비해두는 것이 안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기쁨들을 귀하게 생각한다. 조바심을 느꼈던만큼 잘 해냈을 때 뿌듯함이 더 크고, 구멍이 숭숭 난 여행 스케줄을 뜻밖의 일들로 빼곡히 채워돌아오는 게 즐겁고, 원래 간식이란 건 심혈을 기울여 반으로 쪼개 나눠먹을 때가 가장 맛있더라고.

 이왕에 가치관에 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으니, 드물게 내가 글자 한 자 한 자 모조리 공감하고 사랑하는 최인훈 <광장>의 1961년판 서문을 붙이며 마무리해야겠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중략)……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중략)……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그 곳에 이르는 길에서 巨象의 자결을 목도한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쫓으면서 온 사람도 있다. 그가 밟아온 길은 그처럼 갖가지이다. 어느 사람의 노정이 더 훌륭한가라느니 하는 소리는 아주 당치 않다. 巨象의 자결을 다만 덩치 큰 구경거리로밖에는 느끼지 못한 바보도 있을 것이며 봄 들판에 부유하는 민들레 씨앗 속에 영원을 본 사람도 있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 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 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이명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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