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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Nov 30. 2020

단테 <신곡-천국편>

천국 

2019년 10월 21일 씀


 순례의 종착이자 완성인 천국이건만, <신곡> 3편 중 가장 인기있는 건 단연 지옥편이다. 천국을 읽고 나니 드는 생각은, 최악의 고통보다 최고의 행복을 상상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단테에게? 아니, 독자들에게.


 지옥과 연옥에서 가해지는 고통은 인간의 몸으로도 손쉽게 통증을 가늠할 수 있어서, 읽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고 순례자의 눈물에 얼마나 가혹하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리 힘들어할까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천국을 가득 메운 사랑의 빛은 초인으로 변모하여야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단테는 수시로 독자들에게 상상해보라!며 소리치고 신앙이 약속하는 천국이 분명히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서술을 더 많이 사용한다.


 (발췌) 이 영원한 천상의 진주가 우리를 제 안에 들이는 꼴은 물이 빛을 받으면서도 갈라지지 않고 온전한 것과 같았다.


 (발췌) 오, 고귀한 저의 뿌리시여! 보통 사람들은 두 개의 둔각을 지니는 삼각형을 모르듯이,


 (발췌) 그리고 새로운 것이 이전에 포기한 것을 담지 않는다면 바꾸는 것은 언제나 헛된 일이지요. 6은 4를 넘어서고 담고 있잖아요.


 이 문장 읽고 소리 내서 다시 읽어봤다. 와... 어떻게 이렇게 쓰지? 숫자를 써넣은 문장이 이런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발췌) 그 새로운 빛들 중 하나의 가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쪽으로 향했다. 나는 별을 가리키는 바늘이었다.


 별을 가리키는 바늘이었다는 표현이 아름답기도 한데, 또 새삼 세로로 길쭉한 인간의 형상에 관해 생각해보게 된다.


 좀 우습지만 <알라딘> 실사 영화를 보고서도 그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인, 쟈스민 공주의 아빠가 몹시 아쉬웠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모자도 수염도 몸도 몸짓도 다 어쩜 그리 둥글둥글하고 폭신폭신한 느낌이 나는지, 특히 '프린스 알리' 씬에서 테라스를 향해 달려나가는 모습은 '두둥실'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긴 인간은 없기 때문에, 실사영화 속에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


 (발췌) 자신만만한 세상 사람들은 하나가 훔치고 하나는 자선하는 것이 보인다고 해서 하느님의 눈을 통해서 본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누가 오르고 누가 떨어지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오로지 신만이 아신답니다.


 (발췌)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선을 행하려는 의지에 깃들며 최고의 선으로 향한다. 마치 탐욕이 악을 행하려는 의지에 깃드는 것과 같다.

 그 의지가 감미롭게 울리는 저 하프 소리를 잠잠하게 했고 천국의 손이 늦추다가 당기다가 하는 거룩한 현의 음악을 잠재웠다.

 지복의 영혼들은 사람들의 올바른 간청에 귀를 막을 수 없는 분들이니, 내가 그들에게 간청할 용기를 주기 위해 그들 모두가 침묵하기로 하신 것이다.


 (발췌) 나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언제나 내 얘기를 들어준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소로 내 소망의 날개에 힘을 주었다.


 순례자를 이끄는 지극한 사랑 ㅡ 간청할 용기를 주기 위한 침묵,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이미 들어주던 베아트리체. 이 문장들만으로도 팔을 감싸는 온기와 천국의 행복을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다.


 (발췌) 영원히 지속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느라 진정한 사랑을 잃는 사람은 정녕 끝없이 슬퍼하리라.


 즐겨보는 인스타툰에서 최근 아래와 같은 대사를 접했다.


 돈은 정말 중요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 그런데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해준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돈이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오해하기 쉬운데, 그건 사실이 아니야. 돈은 정말 중요하지만, 인간에겐 그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어. 만약 원하는 모든 것이 돈으로 다 얻어질 수 있는 삶이라면, 그건 수준 낮은 인생이지. (쏘 쿨) - 인스타그램 ‘punj_toon’ 엄마이야기(2):엄마의 믿음


 그러나 사실은 진정한 사랑도, 수준 높은 인생도 결국은 그 인생을 사는 당사자만이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베르테르가 내 마음은 나만의 것이라고 했듯이, 내 인생도 나만의 것이니까. 다만 나 스스로, 기준이 되는 눈금을 어디쯤에 그려넣느냐에 의미가 있겠지.


 Whenever you feel like criticizing any one...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 F. Scott Fitzgerald


 저 문장을 씹어삼키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불필요한 자기 연민을 버릴 것과 둘은 남에게 가급적 너그러울 것.  


 (발췌) 모든 하늘들은 원동천을 중심으로 돕니다.

 원동천은 하느님의 정신 안에 담겨 있을 뿐 다른 어떤 곳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정신에서 원동천을 돌리는 사랑의 힘이 타오르기 때문이지요.

 이 하늘은 주위를 도는 빛과 사랑에 담겨 있고 동시에 나머지를 담고 있으니, 어떻게 그러한지는 그들의 둘레를 이루는 하느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발췌)  (베드로의, ‘믿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저에게 관대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심오한 것들은 아래 세상의 사람들 눈에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믿음 안에서 존재하고, 그 믿음 위에서 높은 소망이 세워집니다. 그래서 믿음을 실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논리적 증거는 이런 믿음 위에 세워야 합니다. 그럴 때 믿음은 논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심’ 자체에 관심을 갖던 시절, 나는 L교수님의 종교가 궁금해졌었다. 마침 스승의 날 즈음이었고, 올해도 어김없이 꽃다발과 케이크와 카드를 품에 안고 강의실 문 앞에서 교수님을 기다렸다. 그리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조심스레 여쭤봤다. 교수님은 크리스천이었다. 사실은,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교수님이 웃으면서 차근차근 종교의 변천을 짚어가시다 불현듯, 아는 건 아는 거고 믿는 건 믿는 거라고 하셨다.


 셋째 언니는 애인을 만나고나서 크리스천이 됐다. 그리고 확실히 성격이나 가치관이 많이 달라졌다. 우리 셋은 종종 같이 저녁을 먹고 와인을 마시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종교도 화두에 오른다. 또박또박 말들을 늘어놓으면서도 끝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무리하는 나를 보면서, 언니 애인 분은 내가 바로 지금 주님이 이끄시는 여정 위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어릴 적이었으면 저 두 말을 좀 언짢게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괜찮다. 여전히, 힘들 때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보다, 울먹이는 목소리로라도 “박영선 똑바로 안 할래!?” 말하는 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제는 이름이 ‘찬송’인 회사 사람 누군가가 6다리를 걸쳤다는 소문을 듣고, “어쩜 이름도 찬송이면서 그럴수가!”하는 동료의 분개에 웃으면서도 그러게나 말이야, 하고 맞장구 치게 됐다.


/


 두툼한 미주가 고마웠다.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존경하는 사람을 잡아먹으며 힘과 덕을 흡수하려던 과거 브라질 원주민들의 카니발을 언급하기까지 하면서 단테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었다. 가죽을 두드려 책을 만들던 시대의 글이, 전기를 먹인 아이패드 화면으로 책을 읽는 시대의 내게ㅡ 작가와 나 사이 이토록 아득한 시간차를 넘어 여전히 놀라움과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 또 놀랍고도 감동적이다. 그걸 가능하게 해 준 번역가 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조선일보에서 어제(10월 19일), 이어령 선생님의 인터뷰 기사를 냈다. 추천하고 싶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3/0003481055?sid=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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