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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Nov 05. 2020

괴테 <파우스트> (1)

 2019년 9월 15일 씀


파우스트는 인간의 불완전함에 관한 이야기다.

 (발췌) 우리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보니 내 가슴은 거의 타버릴 것만 같다. 하기야 ... 온갖 멍청이들보다는 현명한 편이지. 나는 회의나 의혹 따위로 괴로워하지 않고, 지옥이나 악마 따위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ㅡ 그 대신 모든 즐거움은 사라져버리고, 무언가 올바른 것을 알았다는 자부심도 없으며, 인간을 선도하고 개선시키기 위해 그럴싸한 걸 가르칠 자신도 없구나. 그렇다고 재산과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의 명예나 영화도 누리지 못하니 개라도 더 이상 이 꼴로 살기는 원치 않으리라! 하여 나는 마법에 몰두하였다. 정령의 힘과 말을 빌어 많은 비법을 알 수 있지나 않을까 해서다. ... (정령을 소환하고) ... 아아! 난 그대를 감당하지 못하겠다! ... (조수 바그너를 내보낸 뒤) ... 탐욕스런 손으로 금은보화를 캐려다간 지렁이를 찾아내고도 기뻐하는 꼴이라니! ... 나는 신들을 닮지 않았다! ... 나는 흙더미를 파헤치는 벌레와 닮았다. 흙먼지를 먹으며 살아가다가 나그네의 발길에 밟혀 파묻혀버릴지도 모른다.

 저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고 또 그에 영영 닿을 수 없음을 자인하는 일은, 파우스트에게는 자멸을 택할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지성도, 마법도- 어떤 망토를 두르고 문을 두드려도 굳게 닫힌, 그 고귀하고 신성하고 절대적인 영역에.

 아, 무어라 칭할 수 있을까? 인간의 언어로 가능한 것일까? 신, 진리, 자연, 도그마, ... 이런 무딘 말들로? 아니면 신앙심을 추궁하는 그레트헨에게 파우스트가 마지못해 외쳐댄 행복! 진심! 사랑! 신! 이런 것들로?

 벌레도 인간도 똑같이 출입을 허가 받지 못한다면, 그동안 인간이 쌓아올린 벽돌과 퍼뜨린 노래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벌레가 그 오랜 세월 잎사귀를 씹어먹고 배설한 물질들이 식물의 생태에 미친 효익과 비교해서, 무엇이 더 낫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파우스트는 벌레였다.

(발췌) 메피스토펠레스
 옳거니! 그 자는 독특한 방식으로 당신을 섬기고 있지요. 그 바보가 마시고 먹는 것은 지상의 것이 아닌가 봅디다. 속에서 부글대는 것이 그를 먼 곳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그 자도 자신의 바보짓을 반쯤은 의식하는 모양이에요. 하늘로부터는 가장 아름다운 별을 원하고, 지상에서는 최상의 쾌락을 모조리 맛보겠다는 기세지만, 가까운 것이나 먼 것이나 모두 그의 들끓는 마음을 충족시키진 못하지요.

 메피스토클레스는 한낱 인간이, 마치 제가 천상의 무엇인 양 행세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 한다. 마르지 않는 샘을 향한 파우스트의 갈증을, 자기도취와 쾌락을 입 속에 쑤셔넣어 잠재우는 건 얼마나 유쾌할까! 이 고고한 돌연변이가 숱하게 널린 인간의 모습으로 타락하여, 자신에게 애걸복걸하는 꼬락서니를 보게 되는 건 얼마나 통쾌할까!
 신은 이 놀이를 허락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며.

 파우스트는 대담하게도ㅡ장광설이 함께 하였으나ㅡ 메피스토클레스와 계약을 맺고, 모험을 떠난다. 그리고 그레트헨이라는 사랑스러운 소녀와 사랑을 나누지만, 그녀의 엄마와 오빠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만다. 악마에게 이끌려 향락의 세계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그녀를 구출하는 데는 실패한다.
 
 사랑하는 그레트헨을 구원하는 것은 파우스트가 아니라 신이었고, 그녀가 최후의 순간 구원을 청한 대상 역시도 파우스트가 아니라 신이었다. 한 술 더 떠서, 악마가 그녀가 심판 받았다고 오판했던 걸 보면, 그녀의 구원은 ‘예정된’ ㅡ칼뱅의 예정설; 구원의 여부는 오로지 신만이 알며, 지상에서의 행위와 무관하다ㅡ 것이었다. 즉, 파우스트는 단지 그녀 삶의 파괴자에 불과했다.

 /


아, 그러나 파우스트의 갈망은 인간이면서 주제넘게 품은 오만에 불과한 걸까? 진리를 향한 순수한 열정과 향상심은 인간의 생애에 단지 독일 뿐인걸까? 무언가를 온전히 파악하고자 마음 먹는 것은 불가능을 향한 공연한 몸부림과 진배없는 걸까?

 나카지마 아츠시가 <산월기>에서 한탄했듯이, 그저 ‘인간의 생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길고,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도 짧’을 따름인걸까?

 불완전한 인간의 빈틈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 지성

 이 파우스트는 읽는 내내 <강철의 연금술사>를 떠오르게 했다.

 이야기는 어린 엘릭 형제가 죽은 어머니를 되살리기 위해 금지된 연금술을 행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에 대한 (뜻하지 않은) 대가로 형은 한쪽 팔과 다리를, 동생은 몸 전체를 잃게 되고 어머니를 되살리는 데도 실패한다. 형제는 잃어버린 신체를 되찾기 위해, 집을 불태우고 모험을 떠난다.

 천재 연금술사인 두 형제가 의기양양하게 어머니를 되살릴 궁리를 하다가, 결국 피를 흘리며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 연민과 동시에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중학교 때 이 만화에 푹 빠져서ㅡ지금도 정기적으로 다시 본다ㅡ,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본 건 물론이고 OST 가사를 노트에 옮겨적으며 놀곤 했다. 좋은 노래들이 정말 많지만, 브라챠(형제)만큼 가슴 아픈 것은 없다.

(가사)
용서해 줘, 형이여!
내가 전부 잘못했어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어
대지로 돌아간 자는…

이 세상에 진리를 기록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가르쳐 주세요

나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되살아나게 하는 약은 없는 거야

아아, 상냥하신 어머니
우리들은 당신을 정말 좋아했어요
하지만 우리들이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은 전부 허사였어요

나는 너에게
그 때의 단란함을 되찾는다는
달콤한 꿈을 품게 만들었어
동생이여, 내가 전부 잘못했다

 ...


 죽은 인간을 되살리는 것과 세상 만물의 진리를 터득하는 일은, 같은 수준의 불가능으로 여겨진다. 인간이 내는 먼지들은 눈 하나 깜빡하는 순간에도 금세 빼곡히 쌓이고 역사가 되고만다. 때문에 시간이 흐르는 한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시간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 뿐이다.

 초등학교 때 박영선 백과사전이란 걸 만들려다가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치약은 왜 치약이에요? 사자는 왜 사자예요? 이런 질문을 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뭘 하나 적고나면 한 줄을 띄우고 다음 걸 적어놨었는데, 내용을 수정하고 추가하고 삭제하고 하느라 금세 노트가 엉망이 돼서, 나중에는 뭘 적을 엄두가 나지 않아 그만뒀다.

 그리고 세상에는 지성만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도 있다. 이를테면 자식에 대한 사랑, 신앙 같은 것.

/ 신앙
 
 (발췌) 파우스트
복음은 잘 들리지만, 나에겐 믿음이 없다.

 작년 겨울, 클래식에 관심을 갖게 된 나는 저명한 작곡가들의 생애와 클래식 음악사에 관한 책들을 사읽기 시작했다. 성악을 전공한 팀원과 자주 점심을 먹고, 같이 공연을 보러 다니기도 하면서.

 서양 음악이 성가에서 비롯되었음을 읽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신앙심에 관하여, 블로그 혹은 유튜브 댓글 어딘가에서 읽었던 문장은 매우 새로웠다. 복사해두지는 않았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모차르트의 신앙심에 대한 명시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가 작곡한, 신을 찬양하는 음악들의 아름다움에 비추어 볼 때, 그는 투철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기록이 있는가 없는가, 혹은 저 사람의 추측이 옳은가 그른가는 중요치 않았다. 다만 나는 음악의 예술성이 신앙심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무척 놀랐다. 그래서, 신앙심이 없는 내게도 이토록 황홀할진대 만일 신앙심을 품고 듣게 된다면 얼마나 경이로울 것인가를 상상했다. 나는 종교에 관심이 많았지만, 공부가 아닌 믿음의 대상으로 여겨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신실한 크리스천인 팀원에게 오늘날 젊은 신자들이 읽는 책을 추천해달라고 해 사읽었다. 또 다양한 사람들ㅡ모태신앙인 사람, 성인이 된 후에 믿게 된 사람, 열성적이었다가 무신론자가 된 사람ㅡ과 이야기를 나눠보기도 했다. 나중에 얻은 결론은, 나같은 탐구의 자세로는 신앙을 가질 수 없고, 신앙을 가진 순간부터는 더 이상 탐구의 정신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종교의 사회적 기능과 세속과의 영합을 통한 변천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실 L 교수님 역시도 기독교 신자이고, 힘들 때면 기도를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선 정말 깜짝 놀랐다. “그냥, 믿는거죠.”라는 말씀까지 듣고나니 오히려 수월했다. 신앙심이란 건, 나같이 클래식을 더 풍성하게 감상하고 싶다는 자잘한 욕심의 망토를 두른 인간에겐 신비의 장소이지만, 힘겨워하고 눈물 흘리며 기댈 곳을 찾는 인간에게는 자상하게 손길을 내주고 안아주는 집인건가봐.

 어쨌거나 신앙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엔 실패했지만, 저 시절 덕분에 비와이의 이번 앨범 <The Movie Star>를 들으며 굳건한 믿음과 투철한 자기 인식에 가슴 깊이 감탄할 수 있어 만족한다.

 그렇다면 메피스토클레스가 넘겨짚었던 쾌락은 어떨까?

/ 쾌락

 헨리 제임스는 이런 말을 했다지,
 ‘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쾌락을 맛보고 싶네. 수많은 사람들과 장소, 그리고 예술과 자연 따위 말이야! 난 가장 높은 산과, 가장 푸른 호수와, 가장 아름다운 그림과, 가장 훌륭한 교회와, 최고의 명사와, 가장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고 싶다네.’

 확실히, 세상에 머무는 동안 향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은 많고도 깊다. 어쩌면 인생을 즐기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란 건 쉽게 무뎌지므로, 쾌락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ㅡ높이는 게 아니어도ㅡ 점점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하게 된다. 경계심을 유지하는 일이 너무도 어려워서, 파멸로 이어지기가 너무도 쉽다.

 탐미문학의 진수라 불리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美라는 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암흑적인 사상에 자기도 모르게 직면하게 된다. 인간은 아마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미조구치는 금각사의 아름다움에 오랜 세월 천착하지만 끝내 제 손으로 그를 파괴한다. 그건 광기에 사로잡혀서가 아니었다. 금각사를 향한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행위였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연결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 목표

 레이 달리오의 <원칙>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굉장히 유익하고 아주 재미있다. 브리지워터를 설립하고 최고의 회사로 만든 것, 경제 위기를 정확하게 예측한 것, 첫째 아들이 조울증으로 문제를 겪자 최선을 다해 치료되도록 도운 것 등 그는 놀라울만큼 여러 일들을 훌륭하게 해낸 대단한 사람인데, 이 모든 것들은 모두 그의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해졌다.

 ‘의미있는 일’, ‘의미있는 관계’

 목표란 건 유연하고 유용하지만, 스스로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존심을 필요로 한다. 자존심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지식이나 지혜, 자기 능력에의 믿음, 적절한 쾌락을 통한 풍요로운 정신이 필요하다. 거기에 사랑이 더해지면 목표가 된다.  

 이를테면 파우스트가 바그너를 사랑하고 그를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마법사로 길러내겠다는 목표를 가졌다면, 정령 소환에 대해 저부터 정통해야 하므로 연구에 흔들림없이 골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효과적인 교수법을 만들어가며 목표 달성에의 믿음을 키웠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정령을 소환해낸 순간 겁에 질렸던 스스로를 벌레라 자조하는 대신 정령을 소환한 1회의 경험으로 카운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우스트 같은 사람에게 단지 특정 인간의 생애 동안ㅡ또는 그 일부 동안ㅡ에만 유효한 이 목표라는 것은 너무 미천하게 느껴질 것 같다. 음, 그레트헨을 대한 모습을 보면 또 그렇지도 않은가?

 아직 2부가 남았고 모험은 진행 중이니, 그들의 다음 여정을 기대해보련다.

/

 아름다운 문장들이 참 많았다.


 ... 지식에의 갈망에서 벗어나 나의 마음은 앞으로 어떤 고통도 감수하면서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 것을 내 내면의 자아로 음미해 보려네. 내 정신으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것을 파악하고, 그 기쁨과 슬픔을 내 가슴에 쌓아올리면서 내 자신의 자아를 온 인류의 자아로까지 확대시키려네.
 마침내 인류와 더불어 나 역시 파멸에 이르기까지.

 이제 우린 다시 지혜의 한계에 도달했소이다. 이쯤 되면 당신들 인간들은 머리가 돌아버릴 거요. 끝까지 해낼 수도 없으면서, 왜 우리와 한통속이 된 겁니까? 날고는 싶은데 눈앞이 아찔해서 안 된다는게요? 우리가 당신에게 강요한 거요? 아니면 당신이 우리에게 붙은 거요?

 당신은 절 한순간만 생각하시겠지만, 전 당신을 생각할 시간이 많을 거예요.

 오, 고맙기도 해라! 저분은 정말 생각도 깊고, 모르는 게 없으셔! 그이 앞에 서면 그냥 부끄럽기만 하고, 무슨 일에나 네네 하고 대답할 뿐이야. 나야 아무것도 모르는 가련한 아인데 왜 마음에 두시는지 알 수가 없어.

시인
 찬란하게 빛나는 건 순간을 위해 생겨난 것이지만,
참된 건 후세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는 법이랍니다.

어릿광대
 우리도 이런 연극 하나 해봅시다.
풍성한 인간의 삶 속에 손을 뻗기만 하자고요.
각자 체험을 하면서도 의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그걸 붙잡아내기만 해도 흥미로운 것이 되겠지요.
잡다한 형상 속에 약간의 명징함을,
수많은 오류 속에 진리의 불꽃 한 점 흘려 넣으면
그것으로 최상의 술을 빚어낸 셈이니
온 세상은 생기를 띠고 소생하게 될 것이외다.
그러면 꽃다운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당신의 연극을 보며 그 계시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정감에 넘치는 사람들은 당신의 작품에서
감상의 자양분을 빨아들일 것이요,
때로는 이것, 때로는 저것에 감동되어
각자 마음속에 간직한 무언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당장 울고 웃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비약을 좋아하고, 가상의 세계를 즐기지요.
완성된 사람에겐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성숙돼 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걸 읽다보니 몇 년 전의 밤이 떠올랐다.

 우리 팀 선배님의 아버님께서,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드라마 <서울 1945>의 CP님이셨단 걸 알게 됐을 때 얼마나 놀랍고 반가웠는지 모른다. 선배님이 식사 자리까지 마련해주셨는데, 전날 밤 그 드라마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를 빼곡히 적은 팬레터를 건네드렸던 건 무척 신나는 일이었다. 식사 후 선배님은 다른 약속이 있어 가시고, 선배님 아버님과 나 둘이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나눴던 이야기였다.

 선배님 아버님께서는 내가 편지에 쓴 내용 중에, <서울 1945> 캐릭터들의 생애를 보며 역사를 익혔다가 나중에 공부를 하면서, 수많은 다른 사람들 제각각의 삶 역시도 그 시대를 구성하고 있었으리란 걸 깨닫게 되었다는 부분에서 보람을 느낀다셨다. 그리고 그 때 말씀해주신 ‘한강’의 비유가 정말 끝내주게 멋졌다.

 길게 이어지는 물줄기를 따라가다보면 수영하는 사람도 있고, 그 안에 물고기도 살고 또 어쩌면 시체도 들어있을지 모른다. 한강 둔치 어딘가에선 친구들끼리 텐트를 치고 치킨에 맥주를 먹으며 놀고 있고, 또 어느 쪽에선 불륜 커플이 자동차에서 데이트하고 있고, 또 한쪽에선 쓸쓸한 기러기 아빠가 담배를 태우며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을 지도. 그 풍경들 하나 하나가 드라마인데, 줌아웃해서 본 풍경은 그저 한강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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