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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Nov 06. 2020

괴테 <파우스트> (2)

정말로 아름다웠다


2019년 9월 26일 씀



 파우스트가 비로소 만족감을 느낀 순간의 모습은 이러했다.  

 (발췌) 파우스트
 그렇다! 이 뜻을 위해 나는 모든 걸 바치겠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에 둘러싸이더라도 여기에선 남녀노소가 모두 값진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군중을 지켜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ㅡ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구하는 것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투쟁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그 안의 가치를 깨닫고ㅡ 풍요로운 땅과 자유를 선사함으로써, 그 안에서 끊임없이 나고 죽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필연인 소멸마저도 초월한 상태.
 
 메피스토펠레스는 의아해하지만, 인간의 한계에 속박되어 좌절했던 파우스트에게 있어 그동안의 쾌락과 행복은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보통의 인간이 닿을 수 있는 최상의 쾌락, 최상의 행복이란 것이 그에게는 단지 인간이란 형체를 더욱 또렷하게 실감하게 만들 뿐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결국 인간을 넘어선, ‘불멸’에서 만족하고 죽는다. 육신은 쓰러졌지만, 비옥한 토양과 자유를 찬양하는 노랫말에서 그는 영원히 살 것이다.

 읽는 내게도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다. 완공 전, 행복의 ‘예감’을 통해서였단 점이 특히 그랬다.


 /


(발췌) 학사
 이것이 젊은이들의 가장 고귀한 사명입니다!
 세계는 내가 창조하기 전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양은 내가 바다에서 끌어올린 것입니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도 나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하루하루는 내가 가는 길을 장식해 주었으며, 대지는 나를 위해 푸르고, 꽃피어나는 것입니다.
 무수한 별들도 저 첫날 밤에 내 손짓 하나로 찬란한 빛을 발했지요. 속물적인 편협한 사상의 굴레에서 나 말고 누가 당신들을 해방시켰단 말입니까? 그러나 나는 정신이 일러주는 대로 자유롭게 기쁘게 내면의 빛을 따라갑니다.
 밝음을 앞으로, 어둠을 뒤로 하고 나만의 황홀경 속에서 신속하게 나아갑니다.

 흐뭇하게 웃으면서 읽었다. 암, 젊은이라면 이래야지! 자기를 중심으로 새로이 세상을 설계하는 호기로운 시절을 지내야만이, 사람의 사상은 개성을 갖출 수가 있는 법이니.


(발췌) 바그너
 인간을 만드는 중입니다. ... 지금껏 유행하던 생산방식을 어리석은 장난이라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 그 사랑스런 힘 따위는 가치가 없어졌습니다. 동물들은 계속 그런 걸 즐길지 모르나, 위대한 천분을 타고난 인간이라면 장차, 보다 고상한 근원에서 태어나야겠지요.

 고상하다 - 세련되다 - 품위있다 - 같은 말을 쓰려거든, 응당 동물과는 구분되는 어떤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 깃들어야 한다고 여기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그 고유한 특성이란게, 어째서 저런 그럴듯한 말들과 손쉽게 짝지어지는 걸까? 내 발톱은 올빼미보다 고상한가? 내 소통 방식은 고래보다 세련되었나? 내가 먹을 것을 구하는 방식은 늑대보다 품위있나?

 그럼에도 적절한 우월감이나 선민의식을 영 해롭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걸 속으로 삼키면 자기 발전의 근사한 씨앗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겉에다 덕지덕지 바르면 고립을 자초하거나 편협한 인간이 되기 쉽다.
   
 나는 살갗과 온기로 되어있다. 놀랍게도 인간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가 그렇다.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무수한 생명들 중 그렇지 않은 것을 찾기 힘들다. 살갗은 맞대라고 있는 것이고, 온기는 나누라고 있는 것이다.


 (발췌) 호문쿨루스
 안녕하세요, 아빠! ... 자연적인 것에겐 우주 공간도 좁지만, 인공적인 것은 제한된 공간을 필요로 하지요. ...
 어찌 그런 이야기가 당신의 귀에 들어가겠어요? 당신이 아는 건 다만 낭만적인 유령 뿐일 텐데요. 진짜 유령은 고전적이어야 할 거에요.

(발췌) 엠푸제
 사촌동생 엠푸제가 인사드립니다. 당나귀 발굽을 가진 친척이지요! 당신은 말발굽만 갖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사촌오빠, 인사 받으세요!
 메피스토펠레스
 온통 낯선 자들 투성인 줄 알았는데, 제기랄, 가까운 친척도 있었군. 족보책이라도 들춰봐야겠구먼. 하르츠에서 헬라스까지 온통 친척들이니! ... 알고 보니, 이 족속들 사이에선 친척지간이라는 게 큰 의미를 갖는구먼.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겨도 좋으니 그 당나귀 대가리만은 집어치워라.

 1권 발푸르기스의 밤은 흐릿한 공기에 휩싸인 환락의 공간으로, 몽롱해진 정신을 어떻게든 부여잡지 않고는 쾌락의 늪에 같이 녹아흐를 것만 같이 아찔했다. 그러나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이쪽 저쪽에서 어깨를 끌어당기고, 이러쿵 저러쿵 한 마디씩 보태는 흥겨운 축제같은 느낌이랄까! 생명력으로 충만한 물결이 쉬지않고 넘실거리고, 그 물방울이 반짝이며 떨어지는 곳곳마다 기이하고 희한하게 생긴 존재들이 말을 걸거나 저들끼리 속삭이고, 더군다나 메피스토펠레스마저도 낯설어하고 신기해하니 읽는 나도 덩달아 신이 나고 흥미진진했다.  

(발췌) 아낙사고라스
 ... 그대여! 천상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분이시여, 세 가지 이름과 세 가지 형상을 지닌 자여, 우리 종족의 고통 때문에 당신을 부르나이다. 디아나, 루나, 헤카테여! ...

 ‘천상’과 ‘셋’이 뜻하는 게 달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고전주의에서라야!

(발췌) 포르키아스들
 ... (메피스토펠레스가 포르키아스의 옆모습이 되자) ... 새로 생긴 세 자매는 정말 미인이야! 우리는 이제 눈도 둘, 이빨도 둘이에요.

(발췌) 호문쿨루스
 저 못생긴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흙으로 구운 형편없는 항아리들 같군요. 그런데도 현자들이 스스로 부딪쳐 자기 머리를 깨뜨리는 거군요.
 탈레스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탐내는 것이라네. 동전도 녹이 슬어야 값이 나가는 법이거든.
 프로테우스
 나같이 늙은 공상가에겐 저런 게 마음에 든단 말이야! 괴상하면 괴상할수록 더욱 존경심이 간단 말이거든.

 하하.


/

 아, 글이 어쩜 이럴까? 원어로 읽고 어감마저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파우스트
저는 숨이 막히고 몸이 떨리고 말문이 막힙니다. 시간도 장소도 사라져버린 꿈만 같습니다.
 헬레나
제 삶은 끝났지만 새로 시작하는 것 같아요. 낯선 당신에게 정성을 바쳐 하나가 된 것 같아요.
 파우스트
한 번뿐인 운명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지 마십시오.
존재한다는 건 의무입니다. 비록 순간적일지라도.

 헬레나
 인간다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선 사랑이 고귀한 두 사람을 가깝게 하지만, 신과 같은 기쁨을 맛보기 위해선 사랑이 귀중한 세 사람을 만들어놓아요.

 대주교
... 교황께서는 아직도 폐하의 대관식 날 그 마술사를 방면하신 일을 잊지 않고 계십니다. 폐하의 관으로부터 첫 은총의 빛이 저주받은 자의 머리 위에 떨어진 것은 기독교에 대한 모독이었나이다. ...

 파우스트
 부유한 가운데 결핍을 느낀다는 건 우리의 고통 중에 가장 혹독한 것이다.

 망루지기 린코이스
 보기 위해 태어나 살피라는 분부 받고,
망루에 맹세하니 세상이 좋기도 하구나.
먼 곳을 바라보고 가까운 곳도 살펴보며,
달이며 별이며 숲이며 노루도 본다.
삼라만상 속에서 영원한 장식 보노라니,
만물이 내 마음에 들듯 나도 내 맘에 드는구나.
복 받은 두 눈아,
너희들이 지금껏 본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정말로 아름다웠다!

 망루지기 린코이스야, 나도 네가 마음에 들어!
내 복 받은 두 눈이 너의 아름다운 생각을 읽어내려간 시간 역시도
정말로 아름다웠단다!

 
/


 읽으면서 참 재미있었다. 1권,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들렀던 술집의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 속 ‘루터 박사님’이 종교 개혁의 그 마르틴 루터인지 아닌지 알아보려고, 파우스트/루터의 생몰년과 루터가 파우스트를 언급했다는 기록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그 루터가 맞다.) 신성로마제국이 있던 시절의 유럽 지도를 다시 한번 살펴보기도 하고. 2권,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에 나오는 온갖 괴물들의 생김새를 살펴보며 메피스토펠레스의 기분을 함께 느껴보기도 하고.
 
 가장 큰 수확은 역시나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이제는 불현듯 고대 그리스의 군상들이 쏟아져 나온대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위대한 연금술사 파라켈수스와 악마가 깃든 그의 검 아조트에 대해서도 읽었고, <강철의 연금술사>의 호문쿨루스가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캐릭터인가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또 번역가 분께도 두 손 모아 칭찬을 보내고 싶다. 언어가 다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각운을 맞추는 대화)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무척 매끄럽고 문학적으로도 아름답게 잘 읽혔다. 특히 아래 문장은 최고였다.

 무엇이 수런수런 찰랑찰랑 잔잔한 수면을 교란하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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