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없는 여행은 당연한 이치
12월 하고도 27일 일정은 확정되었고, 여행사에 입금도 했고, 떠날 일만 남았다. 비행기를 타는데 설레어하는데 하나도 설레지 않는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오래전에 다녀온 곳이라서 그런가? 그럴 리는 없는데 어차피 다 까먹어서 그때의 날씨도 풍경도 블로그 사진을 들추어 봐야 어렴풋이 기억날 뿐인데, 도대체 왜 설렘이 없는가? 해외 워크숍이란 자고로 해외 + 워크숍이 붙은 한자와 영어의 조합인데 여기서부터 큰 뜻이 숨어 있었다. 아,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딱 붙어 다녀야 하는 것이구나. 샴쌍둥이처럼 우리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것.
옆팀에 일이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이 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잠시 나서서 스케줄 조정을 하면 되었는데 그 누군가 나서지 않아서, 아니 나서지 않고 그냥 맡은 바 일을 했으면 되었는데 그걸 하지 않아서 결국 누군가는 노발대발을 하고 또 누군가는 쓴소리를 들어야 했으며 또 누군가는 그 사태로 인해 워크숍을 가지 않고 남아서 일을 하겠다고 하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나는 그 태풍의 눈에 있지도 않았으나 그 옆에서 덩달아 기분이 다운되어 이런 사태를 야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결국 나는 모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졌다. 하루아침에 사르르 녹아버린 나의 평정심.
회사를 오래 다녀서 내심 마음을 어떻게 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나를 숨기는 법도 알게 되었고 또 어떻게 하면 산산이 부서졌던 마음도 본드로 붙여서 판판하게 평평하게 만들 수 있는지 나만의 노하우가 생겼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누군가에게 말하기도 쉽지 않은 현상이고,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네가 왜 잔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기분이 나쁘냐고 하겠지만, 너무 오래 가까이 보면 예쁘지 않은 것들이 더 잘 보이게 된다.
그게 회사 사람들이다.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가 우리들의 업무시간이나 보통 나는 그전에 사무실에 도착하고 그 후에 퇴근을 한다. 칼퇴근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우샤인 볼트급의 스피드를 가진 이들은 나보다도 많고, 출근시간은 의외로 거북이보다도 느리게 그것도 핑계를 등짐처럼 지고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걸 일일이 말하면 꼰대처럼 잔소리가 심하다 또는 상사 노릇 한다고 해서 어지간해서는 말을 안 하는데, 참다 참다 폭발하기 일보직전에 대표님이 크게 잔소리를 하곤 한다. 그건 그렇고, 예전만큼 야근이 많고, 때로는 철야를 하거나 하는 이상한 시스템에서는 벗어난 지 오래다. 업무시간 내에 끝을 내려고 노력하고 광고주들도 무턱대고 요구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끔은 아직도 광고대행사임을 잊지 않으려고 ‘야근’이라는 것도 하고, 또 주말 출근도 한다. 그렇게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은데, 굳이 연말을 같이 보내려는 그 속셈은 모르겠고, 내가 대표님도 아니고 따라갈 수밖에.
캐리어를 싸야 하는데 주말에 싸놓은 파우치들을 때려 넣고 여권은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작은 가방에 꼭꼭 챙겨 넣었다. 패키지로 가는 것이니 크게 현금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현금을 좀 챙겨서 넣고, 그러면 되었다 싶었다. 아침 8시 20분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다. 역으로 계산하니 집에서 5시 좀 넘어서 나가야 공항버스를 타고 도착할 수 있겠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꿈에서 비행기를 놓치는 꿈을 꿨다. 눈을 뜨니까 1시가 좀 넘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1시간씩 쪽잠을 자다가 4시 40분에 눈을 뜨고 일어나 5시에 길을 나섰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리무진 공항버스를 타는 정류장에 섰다. 다행히 식당 TAKE 아웃 손님들이 대기할 수 있는 장소가 정류장 바로 옆에 있었다. 그 비닐천막 사이에 들어가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 밤에 이 추위에 서 있는 것일까. 여행을 떠나며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한 적은 없었던 거 같다. 보통은 미지의 세계에 대해 설레거나, 아니면 흥분되거나, 또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곤 했는데, 이렇게나 마음이 천근만근일 줄이야. 다행히 버스는 내 마음과 다르게 스무스하게 내 앞에 도착했다.
짐을 싣고는 올라가서 앉았다. 주머니에 넣어둔 핫팩이 뜨거워서 깜짝 놀랐다. 주머니 표면까지 열이 폭발하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얼어있던 손은 이내 따뜻해지고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깊이 잠들지 못하는 건 정류장마다 한 번씩 서고 하필이면 캐리어를 넣는 짐칸 위에 앉아서, 기사님이 짐칸 문을 닫을 때마다 나도 같이 창고방에 갇히는 기분이 들었다. 쾅쾅.
다음에 꼭 공항버스를 타면 혼자라도 두 명 좌석을 앉아서 짐칸 테러를 피해야지 라고 생각했다. 과연 공항버스를 지하철처럼 자주 타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런 결심은 금세 까먹을게 뻔하다. 6101번을 탔는데 길음역에서 자꾸 기사님이 직통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라고 종용하셨다.
사실 그것까지 계산해서 돌고 도는 루트에 걸리는 시간까지 계산해서 이 버스를 탄 거였다. 굳이 일찍 도착할 이유가 없었고, 갈아타는 건 귀찮았다. 기사님의 친절한 권유를 큰소리로 ‘그냥 이거 타고 갈게요’라는 대답과 어색한 웃음으로 때우고 다시 눈을 감았다. 언젠가는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 데려다주겠지. 아직도 여전히 창밖은 깜깜하고 평일 목요일 도로에는 차들이 슬금슬금 많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