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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현 Mar 30. 2019

[열여덟 여행]02. 하늘이 설레지 않는 건

내 옆 자리에 사장님이 있어서일까

한 달 만에 보는 2 터미널이 보였다. 버스가 섰다. 나는 일어서서 작은 손가방을 크로스로 메고는 내릴 태세를 갖췄는데, 파란 손가방은 내 손에서 주르륵 벗어나고 있었다. 줄이 끊어졌다.      


정말 끈 떨어진 갓처럼 슬로비디오로 주르륵

오 마이 갓     


처음 메고 나온 거였는데, 이때부터 이번 여행의 조짐은 좋지 않았다. 가만히 보니 몸체와 끈고리를 이어주고 있는 부분이 떨어졌다. 아니 뭘 얼마나 썼다고 그게 떨어져?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이 또 전두엽을 흔들었다. 디자인 페스티벌을 갔다가 발견한 여행 가방인데 작아서 쓸모가 있겠다 싶어 30%나 세일을 한다길래 득템 했구나 싶어서 사 왔더니 그렇게 여행 출발 전에 떨어졌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손잡이를 들고 캐리어를 끌고 터미널에 들어갔다. 가방 때문에 이미 또 기분이 상했다. 내 기분은 이제 멀쩡한 부분이 좀 없는 거 같았다. 가이드를 만나기 전에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어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사고 잠시 두꺼운 옷을 넣으려고 캐리어를 열어 다시 짐을 싸고 에코백을 꺼냈다.      


커피 한잔을 마셨더니 끈 떨어진 가방과 함께 떨어진 기분이 좀 올라왔다. 단체로 모여 있을 H 근처에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겨우 시간을 맞춰 갔다. 이미 같은 방을 쓰게 될 C는 이미 들어갔다. 빠르다. 이유를 몰랐다가 나중에 알았는데 그건 나중에 쓰겠다.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제2터미널은 여전히 크고 새것 냄새가 났다. 가이드를 찾아 안내물을 받았는데 체크인도 셀프로 해야 하고, 짐도 셀프로 붙여야 한다. 뭐지? 이 하나도 패키지여행 같지 않은 기분은 난감해졌다. 이래서 더 여행 가는 맛이 사라지는 걸까 싶었다. 

항공사 직원에게 여권을 내밀고 여행 가는 사람이 ‘나’ 임을 인정받고, 행선지를 묻고, 도톰한 재질의 종이티켓을 받고, 짐을 붙이면서 나의 캐리어와 잠시 이별을 하고는 이제 이 나라와는 잠시 안녕이구나 그런 애틋해지는 심정은 느낄 새도 없었다. 일련의 과정이 사라져 버렸다.      


셀프체크인 기계에다 내가 직접 여권을 스캔하고 몇 단계를 거치니 티켓이 구멍에서 날름하고 혓바닥을 내밀 듯이 토해져 나왔다. 짐을 부치지 않아도 되겠지만, 또 안 부치면 섭섭하니 다시 창구로 가서 짐을 부친다. 참으로 두 번 세 번 생각해도 굳이 짐을 부칠 거면 발권과 수화물 부치는 걸 동시에 해주면 좋을 텐데, 묘하게 비효율적인 시스템이 분명한데 언뜻 보면 혁신적이다. 결국 짐은 직원들이 부쳐준다. 그리고는 셀프 위탁 수화물이라니.

그건 그렇고. 빨리 출국심사를 하려고 뒤도 쳐다보지 않고 내달렸다. 회사 동료들은 사장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겉옷을 벗으며 들어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출국심사를 마치며 면세구역으로 입성했다.      


딱히 면세점을 들를 이유는 없었다. 이미 지난번에 사야 할 것들은 구입했고, 견물생심이라고 보면 또 눈이 돌아가서 필요하지 않은 립스틱도, 향수도 꼭 내 것인 거 같아서 사게 되니까 눈을 감고 지나쳐 가기로 하는데 역시나 입이 메말라왔고, 내 줄이 끊어진 가방 안에는 립글로스가 없었고, 그렇게 하나 날름 구입을 하고는 회사 직원을 만날까 봐 레이더를 높이고 여기저기 흘러 다녔다. 출발할 곳이 아닌 다른 게이트 앞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다른 여행자들도 자신이 출발할 곳이 아닌 남의 게이트 앞에서 누워있기도 하고, 어떤 이는 캐리어 뱃속을 열어 뒤집어 다시 짐을 싸기도 했다.  

철저히 혼자 있고 싶었다


배가 고팠는데 스타벅스 앞으로 가니 동료들의 익숙한 머리통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나는 그들과 섞이기 싫어하는 것일까. 주린 배를 부여잡고 내가 절대 가지 않을 곳. 키즈카페를 기웃거리다가 VR 체험이 있는 IT기술 체험장을 들어갔다. 아르바이트 생들은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설명을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이글루 형태의 집에 관심을 가지자 그 안에 들어가면 우주여행을 할 수 있을 거처럼 내 혼을 쏙 빼는 설명을 하며 나를 이글루 안으로 밀어 넣다시피 했고 나는 어느새 바닥에 몸을 누이고 로켓이 발사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주여행이 아니라 그냥 달나라 착륙 정도였는데, 자막이 없이 나오는 영어 다큐멘터리를 제대로 이해할리 없고, 기억이 나는 것은 달의 표면을 확대한 장면들이다. 일본 여행을 가기 전에 옥토끼가 없는 달나라 여행을 마치고 이글루를 빠져나왔다. VR로 윙슈트를 입고 비행을 하는 것이 있었으나 그것은 감히 내가 도전할 것은 아니어서 웃음을 지으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회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타요버스가 있는 키즈카페를 향했다.     

너무 허기가 져서 작은 카스텔라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새삼 카스텔라는 맛있었고, 게눈 감추듯이 먹고 나서는 아메리카노로 입가심을 했다. 나를 찾는 C는 키즈카페에 있다는 소식에 놀라듯이 찾아와서 결국 234 게이트 앞으로 갔다. 어제의 사건으로 대표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고, 그와 상관없이 동료들의 표정은 날씨 좋은 소풍날이었다. C와 나는 괜히 사장님 앞에서 ‘목베개’에 관심을 주며 언제 샀냐고 물었고, 표정이 풀릴 때까지 가장 좋았던 여행지를 어색하게 물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좋았다는 이야기에 은근히 나도 가야겠다고 어필을 했으며(올해 가보고 싶은 나라 중에 하나니까) 그렇게 핑퐁 대화를 C와 내가 거들다 보니 그나마 대표님의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고, 타이밍 맞춰서 비행기를 타야 했다. 대한항공 모닝캄 회원은 40회를 타야 자격이 주어진다고 하고, 대표님은 마일리지가 40만 점이라 했다. 괜한 걸 물어봤다 싶었다. 우리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     

비행기 좌석을 찾아갔더니 어쩌면 나란히 앉게 되었다. 사장님과 나와 C가 같은 라인이었다. 그런데 또 사장님 심기 불편하게 다정한 세 모녀인지 가족인지가 우리 자리에 앉아있었다. 왜 꼭 남의 자리에 떡하니 앉아있는데도 표정은 평온한지 모르겠다. 보통 감이 오지 않나? 남의 좌석이라는 느낌. 우리가 가서 그쪽이 여기 좌석은 아닌 거 같다고 하자 비행기표를 꺼내더니 이상하다며 일어났고,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갔다. 비행기라는 공간의 좌석은 표는 끊었지만 들어가면 아무 데나 앉을 수 있었던 1980년대 서울 외곽의 동시상영관이 아니다. 그분들을 탓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장님을 옆에서 분위기 맞춰야 하는 내 입장이라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어지간해서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 C가 창가에 앉고 내가 중간에 앉고 복도 자리에 사장님이 앉았다. 


“너희들은 뭐 먹었니?”

“아 그냥 커피랑 조금이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C는 라운지에서 아침을 거하게 먹은 상태였다. 어서 빨리 이륙을 하고 샌드위치가 나왔으면 싶었다. 그렇게 사장님이 물어본다는 것은 사장님이 지금 시장하다는 의미니까.

그러나 정작 비행기는 활주로에서 이리저리 꼼지락대며 출발을 못하고 있었다. 겨우 순서를 맞춰 하늘 위로 떠올랐다. 설렘이 폭발해야 하는데 사장님 옆이라 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책을 펼쳤지만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장님이 보는 책을 슬쩍 엿보는데 다행스럽게도 승무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시장함을  참지 못하는 걸 눈치챘는지 재빠르게 샌드위치가 배달되었다. 아, 또 다행이다. 내가 한 달 전에 갔을 때는 빵이 퍽퍽했는데, 이번 것은 어떻게 먹어도 맛있는 빵. 크로와상에 연어가 들어있는 샌드위치였다. 나란히 앉은 우리 셋은 게눈 감추듯이 다 먹었다. 

나는 배고파서, 사장님도 배고파서, 라운지에서 그렇게 몇 접시를 먹었다는 C도 다 먹어치웠다. 영양소를 생각해서 오렌지주스까지 먹고 났더니 아주 조금 포만감과 더불어 비행기를 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까 착륙을 한다고 한다. 집에서 공항을 오는 것보다 더 빨리 일본에 도착했다. 착륙 솜씨가 월등한 기장님이었다. 물개 박수라도 쳐드리고 싶었는데 화상통화가 안 되니 그것은 무리였고, 사장님 외 나란히 앉아있던 2인은 그렇게 무사히 1시간 남짓한 비행을 마치고 일본에 도착을 했다. 그 외 열다섯도 각자의 자리에서 비행을 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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