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고, 건강하고, 성실하고 그것은 어렵고.
가난하게 태어나서 부유하게 죽고 도중에 아무도 헤치지 않는 삶.
가수이자 트럼펫터 루이 암스트롱의 생애를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평했다.
하나의 인생을 한마디로 축약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지만 한마디로 루이 암스트롱은 착하고 열심히 살았던 분이 아니었을까
서른한 평생 그리고 현재까지도 조언하기를 좋아하는 어른들은 어딘가 붕 떠있는 눈으로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더듬으며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것들에 대한 조언을 쏟아낸다. 수 없이 많은 어른들에게 들어온 이야기는 자기 자신의 경험에 비추었지만 흔히 군대 이야기, 학창 시절, 직장 생활과 관련된 이야기 등 뻔한 이야기였다. 나는 수많은 조언들을 들으며 공통점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이야기 끝나갈 즈음, 초점 흐린 시선으로 나지막이 ‘착하게 살고, 건강 챙기고, 뭐든 열심히만 하면 돼’를 허공에 뱉으며 주섬주섬 담배를 입에 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어릴 적엔 이런 조언이 허세적이고 상투적으로 느껴졌다. (아직도 가끔 허세로 느껴지기는 한다.) ‘착하게, 건강하게, 성실하게’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살아온 기본 중에 기본이었고 그것들을 실천하는 데 있어 그리 애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먹고 있던 초콜릿의 절반을 짝꿍에게 떼어주고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신나게 뛰어다니고 수업시간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 짝꿍도 내게 우유에 타 먹는 초코 가루 한 봉지의 절반을, 혼자서 만끽할 수 있는 단맛의 쾌감의 절반을 아주 흔쾌히 내주었다. 그때는 나누고, 뛰놀고, 같을 것을 반복하는 것이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암스트롱의 문장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장에 적어둔 것을 보면 나는 분명히 그것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가진 것도 딱히 없지만 없던 것을 갖게 되면 잃기 두려운 마음에 나누기 어려워지고, 내가 나누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나눔의 손길 또한 두려워졌다. 운동하여 땀을 흘리는 것보다 술이나 자극적인 컴퓨터 게임을 쫓으며 몸을 해쳤다. 책과 사전을 펼쳐가며 궁금한 것을 알아내던 집요함은 누군가의 집요함으로 요약해놓은 10분짜리 영상으로 대체하였다. 그마저도 지루하면 10초씩 앞당기기 일쑤였다. 나에게 초코 가루 한 봉지의 절반을 떼어주던 내 짝꿍도 나처럼 어른답지 못한 어른으로 자랐을까? 숨이 차도록 뛰었던 초등학교 운동장은 아직도 같은 크기일까? 내 수많은 숙제들은 어디로 갔을까? 무의미한 것들을 손에 쥐느라 손가락 사이로 꽤 많이 중요한 것들이 빠져나갔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이었다.
요즘에 나는 내 삶에서 틀어진 방향을 0.1도씩 수정하고 있다. 나보다 좋은 것을 품고 있는 사람을 충분히 칭찬하고, 그 사람이 좋은 것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내가 가진 것을 흔쾌히 떼어주려 한다. 나누고 나면 다시 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요즘이다. 내 몸을 움직여 운동하는 것이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충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매일 상쾌한 아침을 마주하고 있다. 지루함을 이기고 계속해서 반복하여 쌓는 것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가에 쫓기는 느낌이 들어 조급하던 마음을 누르고 ‘Just Do It’ 하다 보면 뒤돌아 봤을 때 꽤 많은 것들이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제는 루이 암스트롱의 문장을 알 것 같다. 가난하게 태어나서 부유하게 죽고 도중에 아무도 헤치지 않는 그런 삶.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