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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대문구점 Jan 17. 2023

이렇게 너를 보낸다.

아니근데왜넌욕을..

晦气. 새해 첫 대화에서, 첫 대화 상대가 나에게 건넨 마지막 문자였다. 그녀는 아마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한 토마토색 얼굴을 한 채 미간에 내 천(川) 자를 그리며 휴대폰 자판을 두드렸을 것이다. 빠바바박. 그녀는 화가 나면 휴대폰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내 숨소리마저 방안에 울리는 적막한 밤이었다. 글자는 아무런 표정도, 생김새도 갖지 않은 채 암흑으로 뒤 덮인 침대 위에 홀로 발광하는 휴대폰 화면에 한 치의 빗나감 없이 배달되었다. 감사합니다, 하이 테크놀로지. 두 글자를 보자마자 나는 나쁜 말이라는 걸 직감했다. 과연 기계 덩어리 메신저들은 제 역할을 해내느라 말을 전할 때 상대방의 미세한 얼굴 근육의 떨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몽땅 전해준다. 내가 배운 적 없는 단어였기에 단박에 알 수 없는 단어를 뚫어져라 유추해 보았다. 모르겠는데 번역을 해야 할까. 아니면 계속 몰라야 할까. 궁금증과 회피 본능이 충돌한다. 두뇌의 과열로 열이 오를 것만 같은 기분. 하지만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는 법. 글자를 조심스레 옮겨 담아 번역기 위에 얹는다. 낙첨될 확률이 불 보듯 뻔한 즉석복권을 긁는 마음으로 번역 명령을 나른다. 번역 결과 ‘재수 없는 새끼’. 세상에. 나는 대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덕분에 잠이 달아나서 올해 첫 일출을 보았노라고 고마움을 전해야 할까. 나는 분명 우리는 서서히 손 흔들며 이별했다고 생각했는데.


깜빡이는 커서를 따라 내 눈도 따라 깜빡인다. 똑딱이는 초침 소리가 내 귓가를 맴돌더니 심장 소리와 함께 협주한다. 쿵짝쿵쿵짝. 빠르게 온몸을 회전하는 혈액 덕분인지 온몸은 산소 과포화 상태. 열과 함께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축축해진 겨드랑이를 기축으로 곧장 알레르기 반응이 일더니 온몸이 가려워진다. 어스름에 젖은 창가를 바라보며 덕지 덕지 재수 옴 붙은 딱지를 떨궈내려 벅벅 긁어본다. 그놈의 여인네는 때수건처럼 거친 말로 내 살갗을 뒤집어엎어 주려고 그랬나. 아니면… 목욕재계를 시켜주려고 했나 보다. 새해에는 부정(不淨) 타지 말라고.


어린 수컷들은 본능적으로 상대보다 우위에 서려고 욕이라는 못생긴 창을 든다. (참고 : 나이를 먹으면서 멋없는 욕 대신 멋져 보이는 돈으로 무기를 바꾼다.) 어렸을 때도 나는 못생긴 건 만지고 싶지 않았기에 욕을 입에 담지 않으려 했고 만약 주변에 입에 욕을 장착한 종(種)이 나타난다면, 멸종을 시키거나 추방을 시켰고 안되면 내가 자리를 비켰다.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엄격한 출입국 관리 덕분에 나는 자라면서 욕을 들어볼 일이 없었다. 그러나, 2023년 1월 1일. 무려 서른세 살이나 먹었는데, 욕을 입에 담는 생태계 교란종을 만났다. 그것도 외래종.


돌이켜보면 그 아이는 내가 좋아하는 말보다 내가 싫어하는 말을 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하루는 공유 차량을 빌려 강바람을 쐬며 드라이브를 즐기던 날, 그녀는 야경을 바라보며 강물에 돌을 던지듯 툭 한마디를 던졌다. “네가 돈이 없어도 네 옆에 있는 이유는 네가 착하기 때문이야.” 이 말은 마치 빵의 반죽을 치듯 나쁜 말과 좋은 말을 적절히 섞었는데, 그대로 구워낸 빵의 더운 김은 그 말을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용물의 진의를 가늠할 수 없게 했다. 그래서 나는 뒤 문장만 골라 먹었다. 그래, 착하지. 또 하루는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털고 있는 나를 보며 툭 던졌다. “너 진짜 못생겼다.” 또 하루는 그리고 또 하루는 또 하루는.. 나는 그녀가 돌을 던질 때마다 외국인이라 한국말이 서툴 거라는 가능성으로 그녀의 말실수에 면죄부를 쥐여주곤 했다. 선의랍시고 내가 저지른 관대가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었다.



그날 밤, 우두커니 앉아 커서만 깜박이는 휴대폰 화면 위, 덩그러니 놓인 두 글자를 한참을 바라보다 그만 휴대폰 화면이 툭. 꺼져버렸던 것 같다. 칠흑 같은 밤. 꺼지고 싶었다. 아득한 굴속으로 까무룩.


바람 불지 않아도 밀려오는 파도처럼 시간은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멀리 밀려나게 해주었다. 그 사이 먹어치운 밥알만큼 많은 글을 썼고, 많은 말을 뱉었다. 그리고 많이 걸었다. 걷고 또 걸으며 헨젤과 그레텔이 돌아갈 집을 표시해두기 위해 과자 부스러기를 조금씩 떨어트렸던 것처럼, 그녀와의 기억을 한 조각씩 떨구어냈다. 허벅다리가 뻑뻑해져도 꼭꼭 주무르며 한참을 더 걸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기억의 부스러기가 담겨있던 주머니가 텅 비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주머니를 뒤집어 탈탈 털어낸다.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향해 팡팡 털어낸다.


그래, 이렇게 또 한 사람과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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