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다. 이는 자연의 진리이며 누구에게나 공평한 삶의 조건이다. 대자연의 손님인 우리는, 생명 필멸의 진리를 익히 알고 태어난다. 하지만 진화 과정에서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 삶에 이롭다는 것을 학습했기에 그저 필멸의 진리를 외면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곁에서 본다면 그로 인해 죽음이 내게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나는 어떤 각오로 남은 삶을 살아야 할까.
지난주, 밤늦도록 술을 먹다가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기사님께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적적하셨을 기사님의 시간들을 떠올리며 실없이 던지신 몇 마디를 퉁명스럽게 받아주던 중, 기사님께서 툭 던지신 한마디에 나는 자세를 고쳐 앉게 되었다. 기사님께서는 담담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친구가 얼마 전 죽었단다. 분명 며칠 전까지 웃으며 술잔을 나누던 사이였는데, 불씨가 툭 꺼져버리듯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한 밤, 잠에 들었다가 돌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목도하자 죽음이 내게도 가까이 온 것 같아 무섭다고 하셨다. 담담하셨지만 분명 기사님의 마음속 깊은 곳은 늦은 밤 원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옷장에 숨어버린 아이처럼,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벌벌 떨고 계실지도 모른다.
쿨재즈를 집대성한 빌 에반스도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잇달아 경험해야 했다. 호흡이 중요한 재즈에서 눈빛만으로도 통했던 동료, 자신을 지지해주었던 형, 사랑했던 아내까지. 모두 그의 곁을 먼저 떠나고 말았다. 잇따른 주변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던 빌 에반스도 칠흑 같은 고독함과 두려움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상에서 가장 긴 자살. 빌 에반스의 친구 진 리즈는 마치 생살이 벗겨진 채로 하루하루를 보냈을 그의 삶의 마무리를 지켜보며 꺼낸 목격자 진술이었다.
그는 1959년 이미 재즈계의 전설의 반열에 올랐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눈에 띄어 그의 밴드에 입단하게 된다.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쿨 재즈의 시초로 평가받는 <Kind Of Blue>를 발매하며 스윙재즈(Swing Jazz)와 비밥(Bebop)이 장악하던 재즈계에 판도를 바꾸어 버린다. 당시 재즈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리더였는데, 그조차도 빌 에반스에게 많은 음악적 자문을 구했고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그의 연주를 높이 평가하며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음악가로서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성공을 뒤로한 채,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서 탈퇴한 빌 에반스는 자신만의 트리오를 결성한다. 그는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와 드러머 폴 모시안과 함께하는 '빌 에반스 트리오'를 구성하였고, 이들은 메인 악기를 받쳐주는 '세션'의 개념에서 탈피해 모든 악기가 동등한 비율로 구성되는 새로운 음악을 추구했다. 그 결과 트리오의 스튜디오 앨범 <Portrait in Jazz>(1960), <Explorations>(1961)은 지금까지도 역대 최상의 피아노 트리오 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예고 없이 슬픔은 찾아왔는데, 밴드의 전성기가 한창이던 1961년 7월 어느 날, 빌 에반스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연주자였던 천재적인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25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빌 에반스는 실의에 빠져 몇 달간 집안에 틀어박혀 모든 녹음과 공연을 거부하며 칩거에 나섰다. 최고의 동료를 잃어 슬픔에 헤어 나오지 못한 그를 위로해주었던 건 약물뿐이었다.
2년간의 은둔생활을 보낸 뒤 빌 에반스는 재기를 꿈꾸게 된다. 1963년 재즈 기타리스트 짐 홀과 함께 <Undercurrent>를 발매하게 되는데, 이 앨범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피아노와 기타 듀엣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며 오늘날 까지도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앨범이 성공하자 그의 삶도 다시금 정상 궤도를 찾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연인 엘레인이 달려오는 뉴욕 지하철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둘의 사이는 '아이'문제로 다툼이 있었는데, 당시 빌 에반스는 아이를 갖길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였고, 이에 낙심한 빌 에반스가 가정을 꾸리기 위해 새로운 연인 네넷과 결혼 결정을 한 뒤, 그녀에게 솔직히 고백한 것이 그녀가 자살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된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에 빠진 그는 친형 (해리 에반스)에게 의지하며 힘겨운 날들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79년, 그의 인생에 하나 남은 사람, 해리가 극심한 우울증을 겪다 결국 자살하게 된다.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을 연달아 떠나보내게 된 그는 결국 1980년 9월 15일, 뉴욕의 '더 마운트 시나이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