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구점 130 홍제동 평화슈퍼
글.사진 @geumtoil__
130 평화슈퍼
그 많던 동네 슈퍼는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
어릴 적 고사리손에 500원짜리 동전을 쥐고 슈퍼로 향하던 것이 일상이었더랬다. 나는 그곳에서 시큼하고 달큼한 초콜릿이며 젤리, 과자 등을 사 먹으며 긴긴 하루를 보냈다. 그때 손에 쥐고 있던 간식비 500원은 어느 날 콩나물이나 두부 심부름을 다녀온 대가로 받은 최초의 급여였다. 그래 나는 슈퍼에서 경제를 배웠구나.
그 많던 동네 슈퍼는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 뒤를 돌아보면 아득할 정도로 많은 것이 변했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슈퍼의 자리는 편의점이 대신했는데, 편의점은 슈퍼가 가진 모든 약점을 자본으로 메꾸며 골목을 장악해 갔다. 새벽 2시, 자취방에 놀러 온 친구들과 아쉬운 밤을 보내며 맥주가 모자랄 때 나조차 향한 곳은 슈퍼가 아닌 편의점이었으니 말이다.
홍제동 고은산 자락, 주인 할아버지는 평화슈퍼를 무려 40년 동안 운영해 오셨다고 했다. 40년의 세월이란, 새로 태어나 대학에 입학하고 다시 한번 태어나 한차례 더 대학을 입학해야만 채울 수 있는 긴 시간이었다. 이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한평생의 시간일 수도 있다. 압도적인 시간의 크기에 놀란 나에게 주인 할아버지는 이제 한해 한해 헤아려보기도 귀찮다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시곤 주인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말없이 시간을 더듬어 보다가 가늠조차 어려운 기억의 책방의 스케일에 막막해지셨는지 이내 TV 속 뉴스 채널로 시선을 돌리셨다.
주인 할아버지는 홍제1동에서 24년간 통장을 지내오셨다고 했다. 자신이 통장 중에 제일 고참이라 힘주어 말씀하셨다. 이제는 바뀐 통장의 임기가 2년이며 2회에 한해 연임이 가능하고 최대 6년까지 할 수 있으니, 나만큼 오래 한 사람은 전무후무할 것이라는 자랑 섞어 말씀하셨다. 그 시절은 주인 할아버지가 두고두고 곱씹어보실 빛나는 시절 중 하나였겠구나 싶다.
옆에서 주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주인 할머니는 당시 통장의 보수가 기억하시기로 한 달에 7~8만 원 수준으로 지금에 비해 무척 적었으며, 쓸데없는 청첩장만 들어왔다고 볼멘소리를 하셨다. 할머니의 토크 인터셉트에 할아버지는 말없이 TV 속 뉴스 채널로 다시 한번 더 고개를 돌리셨다.
잠깐의 정적.
할아버지의 자랑스러운 통장 이야기를 할머니는 얼마나 많이 들어주셨을까. 할아버지가 회상한 당시의 통장 업무가 한마디로 ‘동네 일꾼’이었다고 하니,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았을 할머니는 동네의 해결사를 자처하는 할아버지가 내심 답답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어떤 모습을 채근하며 또 감내하셨을까, 속으로 생각하며 다음의 대화거리를 찾아나갔다.
오래전, 홍제천 앞은 개나리만 우거져있는 시골 냇가였다고 한다. 길가에는 돼지 먹이고 닭 먹이는 초가집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지금 그곳은 키 낮은 초가집과 흙바닥이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곧게 뻗은 철근 콘크리트 건물과 빤짝한 아스팔트가 깔려있는데 말이다. 홍제천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넘치고, 가뭄이 들면 그런대로 말라붙었다고 했다. 식당에서 주문받는 일을 사람이 아닌 기계가 도맡아 하게 될 정도로 빠르게 변한 만큼, 홍제천도 커다란 변화의 세월을 관통했으리라.
주인 할아버지는 평화슈퍼를 오픈하기 전, 원래 홍제1동 평화슈퍼 자리 뒤편에서 살고 계셨단다. 현재 용산 전자상가가 들어선 곳에 있던 김장 시장에서 과일 도매상을 하셨다고. 하지만 서울시가 김장 시장에 전자상가를 세우기로 계획했고, 상인들을 영등포 청과물시장과 가락시장으로 강제 이전 시키면서 주인 할아버지는 그 김에 과일 도매상을 접고 지금의 평화슈퍼를 오픈하셨다고 한다. 백사장의 조개껍데기처럼 개발의 파도에 휩쓸려 온 사람의 이야기를 또 하나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홍제천에 살고 있는 나는 가끔 홍제천을 산책하다가 아주 우연히 들러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를 사고, 때때로 과일을 사는 정도로 평화슈퍼를 이용한다. 더욱 간편한 편의점이나 온라인 총알 배송이 어느덧 익숙해졌기에 자연스레 발길이 향하지 않는 것일 테다.
예나 지금이나 어릴 적 손에 쥔 500원짜리 동전의 크기는 바뀌지 않았지만, 어느덧 화폐 가치가 변해버린 탓에 500원짜리로는 평화슈퍼에서 어느 것 하나 쉽게 집을 수는 없다. 관념적으로 앞으로 흐르는 시간 탓에 지나간 옛 시절은 회상하고 상상하는 일 외에는 손을 쓸 수 없는 걸까. 오래된 슈퍼를 담고 싶었으나 정확히 나의 어떤 심지가 이곳으로 나를 끌어당겼는지 여전히 확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날의 경험을 되짚어 볼 때, 적어도 다시 기억하고 싶었던 어떤 시절을 다시 만나보고 싶었던 것만큼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주소ㅣ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361-11
위치ㅣ홍제중앙하이츠아파트 근처
시간ㅣ09:00 - 2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