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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an 29. 2018

왜 '코코'일까

- 기억이라는 이름의 나

멕시코 소년 ‘미구엘’은 음악을 반대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문제는 그가 뮤지션을 꿈꾼다는 것인데, 가족 몰래 음악 경연대회에 참가하려고 기타를 훔치려다가 어떤 알 수 없는 힘의 영향으로 죽은 자의 세상 들어가게 된다. 이 영화는 죽은 자의 세상으로 들어간 미구엘이, 다시 현실세계로 복귀하려고 하는 과정의 모험담이다.     

영화 : 코코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을 빼고서는 아무래도 설명이 안 될 것 같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지닌 기억의 합이다. 우리에게 살아온 날들 만큼의 기억이 없다면, 우리도 없을 거다. 내가 나를 인식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나의 기억'이다.


만약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하룻밤 사이 내 모든 기억이 박보검에게 이식된다면, 그리고 박보검의 모든 기억이 지금의 나에게 이식된다면. 그때부터는 내가 박보검이 되고, 박보검은 내가 될 것이다. 박보검의 기억을 이식받은 서댐은 박보검으로 불리길 원할 것이고, 서댐의 기억을 이식받은 박보검은 서댐이라고 불리길 원할 것이다.(이 경우엔 박보검으로 불리고 싶을 수도 있지만.) 사람의 정체성은 외모가 아니라 기억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알쓸신잡’에서 나왔던 대화중에 어설프게 기억나는 대목이 있는데, 컴퓨터에 사람의 정신을 이식할 수 있는가. 하는 논제였다.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나’라는 사람은 매 순간 모든 자극에 새롭게 반응하면서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기억을 모두 옮긴다 해도, 그것은 기억을 옮기는 시점의 ‘나’인 것이지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말을 되새겨 보면 결국 우리는 모든 기억의 총합이자 매 순간에 새롭게 반응하는 새로운 ‘나’라는 말이 된다.     


우리는 모든 순간 모든 기억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저장하며 산다. 그리고 그 기억이 곧 내가 된다.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서 살고, 기억된 것으로 증명된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육체는 기억을 담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사람이. 곧 한 덩어리의 기억이라면, 그렇다면 사람은 언제 죽게 되는가. 영화 코코에서는 그 점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따뜻한 방식 같다. ‘내 기억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진다.’는 생각을 넘어, 기억되는 한 우리의 존재는 영원히 증명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 나를 기억해준다는 일은,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일이자 나를 진정 살아있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일이라는 것. 누군가를 기억해주는 일은 정말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영화 제목이 왜 '코코'일까.

코코는 영화 속 누군가를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기억해주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다 잊었을 때, 내가 누군가를 마지막으로 기억해줄 수 있을까. 그런 걱정과 욕심이 호흡처럼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내가 모두에게 잊지는 그 때. 나를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기억해 줄 언젠가의 그 사람에게 미리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졌다. 저를 기억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라고.

        

영화 : 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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