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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Feb 13. 2018

Now Is Good

- 나는 죽음을 생각해

나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죽으니까, 그걸 생각할 수밖에 없다. 죽음을 생각하다가 겪는 감정의 변화는 극단적으로 나뉘는 편인데, 어떤 때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렵고, 어떤 때는 해탈한 불자처럼 초연해진다. 분해해놓고 보면 두렵지 않을 수 없는 건데 조금 건방질 때는 가벼워도 보이는 것이다.  

    

얼마 전에 ‘나우 이즈 굿’이라는 영화를 봤다. 특별할 것 없는 영화였지만 어쩐지 보는 내 마음이 조금 동했다. 백혈병에 걸린 여주인공이 치료를 포기하고 마지막 삶을 정리하는 이야기. 그녀는 일탈적인 행동으로 죽음이 주는 허무에 삐뚤어진 대처를 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죽을 수 없는 이유를 가지게 되는, 안타까운 영화였다.     


뻔한 감상을 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던 건 ‘어떤 죽음이 최악일까’ 하는 것이었다. 서서히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불안해해야 하는 것과 죽을 지도 모르고 갑자기 죽어버리는 것 중에서 어떤 죽음이 더 나쁜 건지.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이 6개월 간 서서히 죽어가는 사이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고로 죽는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조금도 의심해보지 않은 그 사람들은 대부분 시한부 환자를 한번쯤 안쓰러워했을 텐데. 자기가 먼저 죽기도 한다. 그렇게도 죽는 것이 삶인 걸 보면 조금 허탈해진다. 참.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의학적 소견 상 죽음이 확정된 사람을 연민하거나 위로할 자격이 나에게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무겁게 들었다. 당장 내일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건데, 나는 너무 내일을 확신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글을 쓰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휙 가버릴 수도 있는 게 삶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타인의 예비 된 죽음을 안쓰러워하는 게 어쩌면 오만 같기도 하다.      


나의 가까운 사람은 내가 이런 생각에 너무 심취하는 것을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습관. 언뜻 비관같이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낙관에 가깝다. 죽음을 생각하는 만큼 삶을 감사하게 되니까. 이런 생각들로 나는, 반복되는 일상이 고단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마다 조금 더 겸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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