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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l 24. 2017

우리가 탈출한 덩케르크

- 그래도 살아야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덩케르크에 40만 영국군이 포위된다. 독일군은 프랑스, 영국 연합군을 옥죄고 있다. 죽고 싶지 않은 병사들은 해안에서 수평선을 바라본다. 고향이 보이는데, 갈 수는 없다. 보인다고 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구축함이 도착한다. 침몰한다. 구축함이 도착한다. 침몰한다. 간신히 새로운 구축함이 도착한다. 침몰한다. 덩케르크는 거의 이런 이야기다.      

출처: 영화 덩케르크

영화가 시작하고 토미는 미처 볼일을 보지 못한 채 도망가야 한다. 간신히 해변에 도착한 이후에도 볼일을 해결하지 못한다. 모든 일상적인 것들이 제한된다는 것 단순한 동작만으로 절실하게 느껴진다. 죽음의 목전에서 살아 돌아와서, 그가 당장 해결하고 싶은 것은 고작 배설인데 그마저도 쉽지 않다. 지척에서 누군가는 시체를 묻고 있다.      


덩케르크에는 결코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방탄을 관통하며 터지는 머리나, 적의 폭격에 팔이 섬짓하게 날아가는 장면은 흔한 것이었다. 이전의 영화들이 지극히 현실적인 부상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전쟁의 참상을 보여줬다면, 덩케르크에서는 그저 무력한 주인공의 표정과 몸짓으로 우리를 아프게 한다.      


구축함에 쫒겨났더니 배가 침몰한다. 침몰하는 바람에 새로운 선박에 타게 되는데, 그 배가 또 어뢰를 맞고 침몰한다. 아군이 보트를 태워주지 않는다. 그렇게 떠나고 싶었던 해변으로 가는 것이 우습게도 간절해진다. 토미는 살아나갈 수많은 기회를 얻으면서도, 번번이 실패하고 매번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남는다. 영화 더 로드의 주인공들이 그랬듯이, 한치 앞의 삶을 살아나가게 된다. 운이 억세게 좋은 것인지, 운이 더럽게 나쁜 건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영화의 결말부가 돼서야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토미는, 그나마 그 중에서 참 운 좋은 병사였구나. 결국 살아남은 걸 보면.   

   

출처: 영화 덩케르크

바다에서는 노인이 요트를 몰고 사지로 들어간다. 하늘에는 적기가 불을 뿜는데 노인은 눈 하나 꿈쩍 않는다. 그의 아들도 마찬가지다. 전투기 조종사였던 아들을 떠나보냈을 때. 이미 가족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중한 것들을 잃은 사람들은 죽음에 무감해지는 것 같다. ‘허트 로커’의 제임스가 떠오른다. 죽음을 극복하는 전쟁터 속의 인물들은 어쩌면 죽음에 닿고자 하는 것도 같다.     


덩케르크에서는 전투 중 사망하는 비행기 조종사를 보여주지 않고, 그의 아버지와 동생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아프게 한다. 때론 장황한 설명보다 한마디 비유가 우리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하늘에서는 복귀를 의식하지 않고 싸우는 조종사가 있고, 그는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무심한 눈빛으로 일관한다. 이런 담담함이 덩케르크를 설명하는 하나의 거대한 비유가 된다.          

출처: 영화 덩케르크

영화의 마지막.      

‘우리는 고작 살아돌아왔을 뿐인데,’

이 말은 다시 한번 우리를 참 아프게 한다. 살아 돌아오는 것보다 중요한 게 무엇이란 말인가. 전쟁은 어찌 지켜낸 삶을 스스로 초라하게 만드나.      


때로 예술은 우리를 기만하고 선동하는 효율적인 매개체로, 수치스러운 삶보다 영광스러운 죽음을 강요하지만, 삶은 비겁한 자들의 것이고, 우리를 존재케 하는 건 결국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삶이다. 비겁한 자들만이 살아남아서 이 세상을 구성한다. 모든 감정과 감각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 비로소 유효하다. 그런 면에서 적어도 삶이라는 현실적 공간에, 살아있는 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걸 우리는 결코 부끄러워 할 수 없다.      

비록 덩케르크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병사들이 지금에야 모두 죽었어도 그때의 귀환이 여전히 의미있는 이유는, 단순히 죽었느냐 살았느냐보다, 어떻게 죽었고 얼마나 살았느냐가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용을 떠나 놀란의 귀신같은 편집 솜씨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지루할 틈 없이 빼곡하게 채운다. 조미료같은 강렬한 재미는 전작들에 비해 덜할지 몰라도 또 다른 의미로 강렬하다.

잔교에서의 일주일, 바다에서의 하루, 하늘에서의 한 시간이 두 시간이라는 한정된 영화상의 시간에서 동일한 밀도를 가지고 진행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영화고 편집의 미학이 아닐까.   

  

출처: 영화 덩케르크


하늘에서, 수면에서, 해안에서, 수중에서, 모든 병사들과 그리고 나는
참 어렵게도 살아남았다. 사실은 그것이 감상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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