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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r 19. 2017

미녀와 야수가 사랑하는 법

- 그들에게 다시 배우는 사랑의 방법론

긴 연애가 끝나고 나면, 다시 사랑에 관해서는 무식자가 된다. 내가 어떻게 사랑이란 걸 했는지 신기해질 정도로.

누군가를 만나서 설렘을 느끼고, 서로에 대해서 아주 사소한 것부터 알아가고, 연락을 하다가, 내 것인지도 모르는 용기를 짜내서 식사를 하고. 그런 일들이 기적처럼 반복되면서 연애가 시작되는 것이, 분명 내가 겪었던 사실인데도 마치 전설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걸 또다시 반복하는 게 가능할까?’ ‘이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하는 회의론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한다. 불문율만 늘어난다.    

 

사랑이 낯설어질 때. 우리에게 다시 사랑을 차근히 알려주는 영화가 있다. 당신이 설령 야수라도 상관없다고 속 편하게 다독이는 영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영화의 내용적 유치함은 건너뛰어도 상관없. 미녀와 야수에서 그럴듯한 복선과 충격적인 반전을 기대하지는 않을 테니까. 중요한 건 우리에게 얼마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일깨워주느냐가 아닐까. 그것에만 집중해서 봤다. 그리고 영화는 생각보다 사랑을 친절하게, 그리고 잘 설명해준다.  

   

영화: 미녀와 야수


내면의 아름다움에 집중하자고 말하는 영화에서 ‘뷰티’한 엠마 왓슨이 여자주인공을 맡고 있다는 건 조금 어불성설이다. 진정한 사랑의 대가로 야수가 미남이 되는 것도 어딘가 찝찝하다. 뷰티인사이드를 볼 때도 그런 생각하지 않았나. 결국 한효주와 유연석이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회하는 아이러니. 결국 중요한 것은 외면의 아름다움이었다는 말인가 싶었다.     

너무 고까워하지 말자. 이 외모지상주의식의 연출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보여줄 수 없으니 아름다운 외형을 통해 알려준 거라고 이해해야 한다. ‘내면이 아름다운만큼 외면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라는 상호간의 약속정도로 넘어가자.      


그렇다면 야수와 미녀는 서로의 악조건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걸까.

영화에서는 크게 3가지 정도로 말하고 있다.    


헌신, 솔직함, 동질감(공감)     


1.헌신

     

아버지는 딸을 위해서 사랑하는 아내를 놓고 시골 마을까지 숨어든다. 좁은 마을의 좁은 사고방식을 감수하면서 작은 마을의 안전함을 택한다. 딸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딸은 아버지의 헌신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다. 그래서 평생 야수의 성에서 살 수도 있었던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도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다.

영화: 미녀와 야수

그렇다. 사랑은 헌신하는 것이다. 헌신에는 보상에 대한 기대가 없다. Give and Take가 아니라 Give뿐이다.

야수가 벨을 위해서 온몸을 던져 늑대와 싸웠을 때. 상처를 무릅쓰고 헌신했을 때 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뜨거운 연애의 한복판, 상대방의 웃음이 내 웃음이 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상대방의 웃는 얼굴을 더 많이 만들어주기 위해서 끙끙댔던 그 헌신이 사랑의 동력이었음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2. 솔직함     


철옹성같은 야수가 자신의 빈틈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둘은 터놓고 웃을 수 있었다. 각자의 콤플렉스를 교환하고, 약점을 고백하고, 어설픈 점을 쑥스럽게 드러낼 때 심리적 간극은 가까워진다.


‘사람들은 내가 웃기다는 데 그게 칭찬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가면 웃음이 멈춰.’     


사귀기 직전의 그 간질간질한 로맨틱도 좋지만, 나는 연애가 궤도에 올랐을 때의 그 아늑한 느낌을 좋아한다. 조용한 카페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커피를 홀짝일 때, 서로 한마디를 하지 않아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그 편안함. 그녀와 있는 시간이 나에게 완전한 휴식인 순간. 과거도 미래도 모두 지워지고 오롯이 현재만 존재하는 순간을 둘이 공유하고 있다는 기분.      

영화: 미녀와 야수

그런 것들은 마치 마약처럼 남아서 나를 사랑에 목마르게 한다. 그런데 둘이 모든 경계심을 허물고 그런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진심의 반복적인 확인이 필요하다. 서로의 상처와 버릇, 단점과 약점을 하나둘씩 풀어놓았을 때. 그런 마음들을 서로가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때 사랑은 한 걸음 높은 차원에 다다른다.

이전까지의 사랑이 ‘그러했기 때문에’로 시작되었다면. (네가 예뻤기 때문에, 네가 유머러스했기 때문에, 네가 똑똑했기 때문에, 네가 귀여웠기 때문에 처럼)

서로가 진심을 내비친 다음부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네가 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소심함에도 불구하고, 네가 키가 큼에도 혹은 작음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 집단따돌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어린 날 비행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그런 사랑은 솔직함에서 시작된다.     


3. 동질감     


나의 연애지론은 이렇다. ‘사랑은 서로의 다른 점에 이끌려 시작되고, 둘의 같은 점으로 유지된다.’


 영화 속에서 미녀와 야수는 모두 어린 시절 부모와 관련된 아픔이 있고, 자신의 유별난 성격적 결함에 대해 고민한다. 둘은 모두 책을 좋아하고, 그걸로 유쾌한 대화를 할 수 있다. 둘 다 서로의 코드에 맞는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다. 둘은 서로 모진 말을 하지 못하는 비슷한 화술도 구사한다.

영화: 미녀와 야수

사랑은 둘이 만나 닮은 점을 찾아내면서, 사실은 우리가 한 몸이었을지도 몰라. 우리가 어떻게 떨어져있었던 거지? 하며 신기해하는 것이다. 닮은 점을 찾아낼 때마다 운명의 증거로 삼는 것이다. 결국은 서로를 이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것. 혹여 다른 점을 찾아내더라도 그걸 기꺼이 이해하는 마음이 서로 닮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뷰티 앤 비스트’는 그 동질감을 서로에게 느끼고 아름다운 사랑에 성공한다.  

   

*     


헌신과 진심, 동질감으로 어렵사리 하나가 된 사랑도 숱하게 깨진다. 이렇게 숭고한 행위가 쉽사리 유지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이상한 일이 될 테니, 어쩔 수 없게 느껴진다.      

사랑에 실패하고 예민하던 감각에 굳은살이 박히면 우리는 종종 다시 야수로 돌아간다. 야수를 야수로 만든 것은 사랑의 부정이었다. 우리가 몇 번의 상처에 굴복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고 할 때 야수에 가까워진다. 결론을 쉽게 내리고, 이전의 얄팍한 경험으로 사람을 재단하고, 냉소적이 될 때에 장미 꽃잎은 하나씩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 야수가 될락말락한 우리에게 영화가 꼭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다.     


야수가 다시 예전의 수려함을 되찾을 수 있었던 힘은 결국 사랑이라는 거.


영화: 미녀와 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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