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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r 21. 2018

남자 그리고 섹스

- 남자의 성욕

남자의 성욕이란 체내에 급격히 침투한 알코올과도 같다. 우리가 소주를 두 병 정도 빠르게 마셨을 때 똑바로 걷기 힘들어지듯, 성욕에 가득 찬 남자는 정상적인 사리판단이 힘들게 된다. 사람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거스를 수 없는 생리적 작용에 가까운 것이다. 비극적이지만 남자의 성욕은 태생적으로 부여받아 깰 수 없는 취기와도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꾸준히 취해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남자는 그야말로 성욕에 취해있다.  

   

성욕이 불편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몇 년 전 중국의 한 남성이 자신의 고환을 직접 잘라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성욕이 성가시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사의 댓글 란은 별 일이 다 일어나는 중국에 대한 놀라움과 남자를 조롱하는 코멘트로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반적인 반응에 앞서 왜인지 모를 측은함과 깊은 공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환을 아프지 않게 잘라낼 수 있다면 나는 흔쾌히는 아니더라도 그 행동을 꽤나 신중하게 고려해 볼 용의가 있다. 섹스로부터 자유로워진 남자는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처나 예수가 성인이 된 이유도 그들이 섹스를 극복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산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흐리게 만드는 것은 성욕이 거의 유일하다. 피곤함이라든가 배고픔은 강력한 욕구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해소도 자유롭다. 매일 먹고 잔다고 해서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매일 먹고 싶고, 매일 자고 싶어서 매일 먹고 매일 잔다. 하지만 섹스를 매일 하기는 어렵다. 비극적이게도 남자는 매일 섹스를 생각한다.      


미투 운동으로 시끄러운 요즘이다. 먼 과거부터 권력을 가진 남자들의 성추문은 끊이지 않았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 받았던 위대한 시인도, 전직 검찰총장도, 유력한 대선후보도, 연극계 거목도, 유명 배우도, 목사도, 스님도, 교수도 모두 연루되었다. 이쯤 되면 언급하기가 처참할 정도다. 모든 계층, 모든 분야에서 남성들은 위대한 업적을 성취하고도 성욕하나를 제어하지 못한다. 애초에 프로그래밍 된 본능이기 때문에 면죄부를 줘야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지족선사는 30년간 면벽하며 수행했음에도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 모든 공부를 허사로 만들었다. 정확하지 않은 설화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권력을 가진 남자는 권력을 통해 여자와 섹스하려 하고, 일반적인 남자들은 호의와 노력을 통해 섹스를 쟁취하려고 한다. 그래서 동등한 위계에서는 여자의 위치가 높아진다. 성적 결정권이 여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많은 남자들이 여자에게 쩔쩔매는 것은 보통 섹스와 관련 깊다.     


남자가 여자에게 호의적인 건 어쩌면 조금 당연하게 느껴진다. 비록 초면일지라도 남자는 여자를 위해 호의를 베풀 준비가 되어있다. 연애에서도 적어도 도입부만큼은 남성의 적극성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남자가 여자에게 베푸는 관심과 친절의 동력은 근본적으로 ‘섹스’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천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영 틀린 얘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는 매력적인 여성과 언제나 섹스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의식이냐 무의식이냐의 차이는 있어도 예외 없다.     


술과 밤이 있는 한, 남녀 간에 친구는 없다. 는 말을 어디에선가 보고 나는 무릎을 쳤다. 나도 친한 여자사람친구가 몇 있지만 한 이불을 덮고 자도 아무 일 없을 거라는 기만은 하지 않는다. 사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지 앞뒤 생각 않고, 섹스를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는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 개인적인 만남은 모두 차단해버린다. 정말 친한 친구니까 괜찮아. 라는 말은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꺼림칙하다.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는 재미있는 대화가 나온다. 해리는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반대로 샐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논리가 몇 번 충돌하고 해리가 남긴 희대의 명언은 다음과 같다.     


“매력적인 여자와 친구할 남자는 없어요.”   

  

그렇다면 사랑의 상대자에 대한 남자의 호감표현과 애정은 모두 섹스를 위해서인가? 그렇지 않다. 일시적인 섹스가 해소된 뒤에도 깊이 남는 애정의 마음, 그리고 정신적인 교감은 남자에게도 풍부하게 있다. 연애와 사랑에 있어서 섹스는 필수 요건 중에 하나일 뿐 전체를 채울만한 것은 아니다. 섹스와 별개로 함께 있고 싶고, 대화를 하고 싶은 여자. 성욕이 해소된 후에도 스킨쉽을 하고 싶은 여자와 남자는 사랑을 한다.      

남자로 태어나 성욕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건, 정말이지 피곤한 일이다. 나는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죽는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지하철에서 가슴이 파인 옷을 입은 여자가 지나갈 때 나도 모르게 돌아가는 눈을 보면서 나는 자주 비참함을 느낀다.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아저씨가 여전히 그 가슴을 응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때는 거기서 더 비참해진다.      


나는 놀이공원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4학년 쯤 된 손주와 어린이용 전망차를 타러 왔다. 잠깐 기구를 멈춰서 문을 열고 기존의 손님을 내려주려는데 짧은 치마에 파인 상의를 입은 여성분이 어린 남동생과 내렸다. 나는 기적적으로 본능을 제어하고 할아버지 일행을 태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와 손주는 여자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탈 생각도 잠시 잊고 있었다. 60대의 할아버지와 10대의 손주, 20대의 내가 그 짧은 순간에 동시에 넋을 빼는 세대 대통합의 장면을 나는 오래 잊지 못한다.


미투의 가해자들과 여러 폭력적인 남성들을 옹호하고 대신 변명하는 글로 읽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성범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으며 이성적 판단으로 예방할 수 있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남성에게 있어서 성욕이란 어느 정도 불가항력적이라는 것을 나는 자주 느꼈다. 평생 풀리지 않을 성욕이라는 저주에 빠진 가련한 나와, 남자들의 운명을 안쓰러워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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