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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n 25. 2018

타자기를 사고 싶었지만,

- 요란한 키보드라도 좋아

타자기를 사려고 중고나라를 한참 뒤져본 적이 있었다. 작년 여름쯤이었다. 클로버 타자기는 생각보다 매물이 많았다. 먹지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쓸 수 있다는, 그 타자기를 나는 살까 말까 한참이나 고민했다.


영화에서 타자기로 글 쓰는 것을 보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투다다닥’과 ‘찰칵찰칵’ 사이의 그 경쾌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자유이용권 없이 몰래 들어와 놀이공원을 구경하는 소년이 된 기분이었다.


글자가 종이에 날아가 박히는 듯한 기분, 너무 깔끔하지 않게 적당히 삐뚤한, 미세하게 다른 투박한 글자의 크기와 클래식한 폰트도 마음에 쏙 들었다. 종이가 옆으로 조금씩 밀리면서 더 이상 쓸 곳이 없어지면 짜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손수 종이를 밀어줘야하는 그 손놀림도 마냥 섹시해보였다. 그런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그 상상에 나의 모습을 대입해보게 됐다. 무심한 표정으로 타자기를 두드리다가 짜르릉 소리가 들리면 드르륵 종이를 밀고 다시 타이핑을 계속하는 장면. 벌써 예술가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타자기는 결국 사지 않게 됐다.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돈 낭비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타자기 타이핑 방법이 키보드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 결심이 굳어졌다. 큰 의지도 없는데 멋져 보인다는 이유로 타자기를 사버리면 더듬더듬 몇 번 연습하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 어딘가에 방치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 대신 타자기를 닮은 키보드를 사기로 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키보드가 바로 그 키보드다. 오른쪽에 넘버 패드가 없어서 가로가 짧고, 동그란 모양의 키캡은 크롬의 때깔을 낸다. 이 레트로 키보드는 칠 때마다 소리도 요란하게 난다.


작년과 올해,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이 키보드의 공이 컸다. 기분이 우울할 때마다 나는 키보드를 더 튕기듯 두드리면서 소리를 낸다. 소리와 동시에 글자들이 화면에 나타난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스프링의 탄한 촉감과 소리에 맞춰서 화면 속 검은 글자들은 동시에 춤을 추고, 그걸 보고 있으면 정말 내 손 끝에서 글자들이 탄생하는듯한 기분을 오롯이 느끼게 된다.


일 년째 쓰는데 아직도 오타가 꽤 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내 키보드가 마음에 든다. 한동안은 계속 쓰게 될 것 같다. 무언가 쓰고 싶은데 글이 잘 써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요란한 소리가 나는 키보드로 바꿔보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확실히 기분이 좋고, 쓸 맛이 난다. 그리고 쓸 게 없는 밤 나의 아끼는 키보드는 이렇게 한 편의 글이 되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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