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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29. 2018

글이 되지 못한 생각들

- 쓰지 않는 핸드폰에서

메모를 자주 한다. 글이라고는 전혀 쓰지 않을 때부터 무슨 생각이 들면 꼭 메모를 했다. 분명히 머릿속에서 한동안 맴돌던 것들이,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생각들이 어느 순간 삭제되어있는 기분이 불쾌하기도 하고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기억력은 별로 믿을만한 것이 못 되는 것 같다.


5월에 핸드폰을 바꿨는데 적어두었던 것들을 동기화하기 어려운 어플에 적어놓은 바람에 옮기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무언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구석에서 오래도록 꺼져있던 핸드폰을 다시 켰다. 그 안에 있는 메모들을 하나하나 넘겨보았다. 너무 간략하게 적어놓아 이해할 수 없는 말들도 가득했다. 그 외에 한 편의 글이 되기엔 너무 짤막한 단상들이 많아서, 그냥 줄줄 읊어보기로 했다.      


글이 되지 못한 메모들, 언젠가는 길게 늘여 써보고 싶은 생각들.(의 일부)     


*

사춘기는 모든 계절이 봄이어서 사(4)춘기일까

*

꽃에게는 지는 일도 피어나는 일이듯

*

텅 비어있는 지하철 안에서도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노인을 나는 아직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늙음과 자리를 당연하게 느끼는 그의 자세를 아직 이해할 수 없다.

*

무겁게 내려앉은 새벽 한꺼풀을 벗기고 나니

*

그림자는 어느 해 어느 때부터 빛에게서 숨어있었을까 고요하게 납작하다

*

간절한 것은 늘 한껏 손을 뻗어도 한 뼘이나 두 뼘 쯤 모자란 곳에 있고, 누군가에게는 내가 그만큼 애매한 거리에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 비극

*

빛의 입자가 나의 눈으로 토도도독 날아와 부딪히는 이유로 내가 볼 수 있지.

어떤 장면은 내 눈이 감당하지 못하는 입자.

때로는 너무 빠르게 날아와 꽂히는 빛 알갱이들.

오래된 근육통처럼 이제야 나를 아프게하는 너의 웃는 얼굴들

*

떠난다는 사람과 내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같이. 무의미한 일들은 세상에 너무나도 많아

*

눈을 감는 것보다 너를 질끈 감아내야 하는 밤은 길기도 길다.

*

밤비가 낮에 내린다고 말할래

*

사적인 그리움

*

나무는 밑으로도 자란다.

*

귤 같은 거. 하나만 먹을 수는 없는 거.

너는 귤 같아. 너를 생각하는 건 귤같아.

*

천천히 추락하는 것과 천천히 착륙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나쁜 짓을 한 번도 안 해봤다는 친구에게. 너 고등학교 때 자전거 훔쳤잖아 했더니, 그것도 나쁜 짓이야? 라고 하길래 알았다. 나쁜짓이 뭔지 모르는 거였다.

*

1미터의 우주

*

초등학교 1학년 형준이와의 대화: 월요일하고 목요일이 제일 좋아요. / 왜? / 그 날에 쪼기 아파트 입구에 달고나 파는 아저씨가 와요. / 달고나 좋아하니? / 한 번도 안 먹어봤어요. / 근데 그게 왜 좋아? / 그냥 보는 거예요. 그게 좋아요. /

*

코를 부딪히지 않는 격렬한 키스. 생모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

*

버스에 닿아있으면서 흔들리지 않는 방법은 내가 도로가 되는 수밖에 없어.

*

사람은 모두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정말 무언가 원했다면 그렇게 살았을 텐데. 망설였다는 건 사실 망설이고 싶었던 거지. 무서움이나 편안함이 용기보다 컸던 거지. 덜 다칠 만큼 딱 그만큼으로 충실하게 살고 있는 거야.

*

공기 중엔 산소보다 질소가 더 많은데 산소얘기 하는 사람은 많아도 질소 얘기하는 사람은 적다. 산소가 행복이라면 질소는 일상일 텐데. 세상에 질소보다 산소가 더 가득하게 있다면 자그만 불씨도 팡팡 폭발하고 말텐데.

*

아랍국가 국기 외우기처럼

가끔은 추억들이 아랍국가들의 국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비슷한 색깔, 비슷한 문양, 비슷한 배치, 그 속에서 정확한 제목을 찾으려고 허둥지둥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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