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Aug 30. 2018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 2012년, 태풍의 기억

이렇게 비가 내리는 모습을 종종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고 표현하고는 하는데, 이런 날이면 나는 2012년의 여름을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된다. 그 해의 여름, 나는 김포 앞바다에서 GOP 초소 근무를 하고 있었다. 7월 말 태풍이 북상하면서 덩달아 비도 쏟아졌지만 어지간히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오지 않고서는 매일 같이 반복되는 야간 근무에는 별 예외도 없었다. 비가 오면 평소 차림에서 얇은 우의를 하나 더 걸칠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밖을 나서면 2분이 지나지 않아 온몸이 흠뻑 젖기 시작했고. 밤을 보낼 초소에 도착할 즈음에는 물에 한번 빠졌다가 나온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 되었다. 우의는 비를 막아주는 용도가 아니라 몸의 체온을 그나마 유지해주는 비닐 담요 역할을 했다.


볼라벤의 규모는 생각보다 무시무시했다. 우리 지역에 도착할 즈음에는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와서, 생활하는 본부(군에서는 소초라고 부른다.)를 버리고 내륙으로 잠시 피하라고 했다. 우리는 2박 3일 동안의 피난을 위해 건물 전체의 모든 짐을 싸가지고 내륙으로 도망을 왔다. 분위기는 나름대로 심각했는데 되려 우리는 몇 달만에 PX를 사용할 수 있다는 기쁨에 설레기만 했다.


태풍이 인천지역을 휩쓸 때, 우리는 건물의 가장 허름한 방에서 피난민처럼 추레한 모습으로 잠을 잤는데 밤새 창문이 바람에 덜컹이고 밖에서는 줄넘기 이단 뛰기 할 때와 같은 바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는 거의 가로로 누운 모습으로 바람을 이겨내고 있었다.


창문이 깨지는 건 아닐까. 나는 하필 창문 바로 밑에서 자고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휘잉휘잉하는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창문은 앞뒤 위 아래로 마구마구 흔들렸다.) 눈을 뜨고 천장을 응시하다가 이따금 창문을 쳐다보았다. 누워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다가 뒤늦게 잠이 들었다.


볼라벤은 무시무시한 태풍이었지만 이를 기억하는 건 그 위력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태풍이 완전히 지나간 다음의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우리는 다시 군용트럭에 올라타고 우리가 버리고 온 소초를 향했다. 해안도로에 진입하자 우리가 근무하는 지역의 해안선과 철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 풍경이 꽤 참혹했다. 모래주머니로 쌓은 진지는 온통 무너져있고, 철책 위에 걸려있던 윤형철조망 (동그랗게 칭칭 감겨있는 철조망)은 아예 떨어져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저걸 우리 손으로 다시 고쳐야 한다니.’ 재앙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간단하게 밥을 먹고. 떨어진 철조망을 철책에 얹어서 묶고, 무너져 내린 진지들을 보수하고, 기동로를 정비하다가 쉴 틈 없이 야간 근무까지 투입되었다. 그런 생활을 거의 이주 정도 했었다.


전 날까지는 태풍 때문에 하늘은 꺼멓고 바람에 건물까지 흔들리는 기분이었는데. 모든 것이 지나간 뒤의 하늘은 정말 티없이 맑고 파랬다. 너무 고요하고, 평온하고, 상쾌한 색이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하늘에도 표정이 있다고 하면 조금 우습지만 ‘여기에 태풍이 왔었다고?’하며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나는 그 뻔뻔하게 맑은 모습을 드문드문 올려다보면서 허탈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우리를 죽음까지 마음먹게하는 우울의 감정이나, 영원을 꼭 믿어보고 싶게 하는 사랑의 감정도 모두 태풍과 같다는 생각을 덩달아 했다. 압도적으로 내 모든 감각을 지배했다가 어디엔가로 사라져버리는 것. 휘둘리던 모습들을 허탈하게 하는 것.

우리는 밖으로나 안으로나 평생 태풍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2012년의 볼라벤은 나에게 그런 깨달음을 남겨둔 채 지나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이 되지 못한 생각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