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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30. 2018

갈릴레이의 마음으로 시를 가르치는 일

- 시에는 정답이 없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부인하고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고
나는 학생에게 시의 정답을 설명하면서 '그래도 정답은 없다.'라고 중얼거렸다.


수학능력시험에서의 국어 과목은 개인의 독서능력을 평가하는 것보다는 논리적 사고능력을 평가하는 것에 가깝다. 모든 문제들은 합리적인 근거를 갖추고 있어서, 그것이 시든 소설이든 이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수능시험 속의 문학들은 문제화되는 순간 문학으로서의 힘을 잃고 해결을 요하는 정보로서만 기능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크게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하는 님으로서의 님, 일제강점기 잃어버린 조국으로서의 님, 불교적 관점에서의 부처가 그것이다. 해석의 모호성에서 탈피하기 위해 수능에서는 일정한 관점을 미리 제시하는 방법을 택한다. 보기를 통해 [이 시에서 님을 '조국'으로 볼 때.]와 같이 밝혀두는 식이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모두 소거해버린 선택지들 사이에서 답은 명확해진다.


내가 불만을 가지는 쪽은 학교에서의 문학 수업이다. 문학에 마치 정답이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일부 훌륭한 선생님들께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인정하고 알려주시기도 하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수업에서는 그야말로 정해진 해석을 주입식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는 몇 명의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작년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시험범위라는 학생의 말을 듣고, 이런 저런 자료를 준비했다. 나와 해설지의 해석은 정반대로 갈렸다. 다음은 오세영 시인의 ‘그릇’이라는 시다.     

그릇1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벗어난 힘.
깨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나는 지금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든 깨진 것은
칼날이 된다.


자습서나 학원 자료들에서는 공통적으로 이 시가 중용의 도를 노래하는 차분한 어조로, 중용적인 생활자세를 추구하고 왜곡된 세계에 대한 대결 의지를 보이는 작품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절제와 균형에서 벗어난 힘’은 그릇을 깨어지게 하니까, 절제와 균형에서 벗어나면 안된다. 라고 볼 수 있다.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차갑다'는 부정적인 어휘기 때문에 안정적인 원이 깨어져서 모서리를 세운다는 점이나 그것이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는 점에서 시가 완전한 형태의 원을 날카로운 모서리보다 이상적인 형태로 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해석을 모든 학생들에게 정답인양 강조할 수 있을 만큼 시가 보편적이고 단편적이느냐고 하면 절대 동의할 수가 없다. 이 시는 ‘진달래꽃’이나 ‘별 헤는 밤’과는 달리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절제와 균형에서 벗어난 힘은 깨어짐으로써 모서리를 만들고 이성의 눈을 뜨게 해준다. 이성의 눈으로 눈 먼 사람들을 의심없는 사랑에서 일깨운다. 더구나 화자는 맨 발로 베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꺼이 베임으로써 성숙하기로 한다. 차가운 이성의 힘을 긍정적인 것으로 본다면, 그리고 맨발로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화자의 마음에 집중해본다면, 이 시는 공고한 질서 속에서 의심하고 깨어지기를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성숙 의지를 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만약 이 시가 중용적인 생활 자세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이성적으로 살지 말고, 맹목적인 사랑의 세계에 갇히자는 것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말고 그저 안전하고 평화롭게만 살자는 시가 된다.


이 시는 1987년 발표되었다. 군부독재 하에 민주화를 부르짖던 시기, 고요하고 안전한 세상의 원을 깨뜨리지도 말고, 둥글게 둥글게 살자고 시인은 말했던 것일까. 나는 아무래도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나는 학생과 시험을 준비하면서, 물론 자습서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 대로 이 시의 주제를 중용적인 생활 자세의 추구 및 왜곡된 세계에 대한 대결 의지라고 가르쳤다. 나는 왜곡된 세계가 깨어지지 않은 원의 세계라고 생각했지만, 문제의 답은 깨어진 사금파리의 세계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학생에게는 자습서의 내용대로 전달했다.     

문학에서 정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정답을 정해놓고 가르치는 것은 큰 문제다. 차라리 수능에서와 같이 관점을 정확히 제시한다면 모를까, 내신교육에서의 국어교육은 너무 일방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문학에 정답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졸업하는 수많은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문학과 멀어지고 그 확신을 지우는데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런 교육방식이,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은 다음 자신의 해석을 해보기도 전에 인터넷에서 정답을 찾는 습관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나는 학생과의 수업 말미에, 내가 생각한 반대로의 해석을 짤막하게 설명하면서 문학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전달하려 애썼다. 네가 지금은 점수를 위해 안전한 방식으로 공부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틀리든 맞든 네가 느끼는 바대로 문학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오늘 배운 그릇에서 말하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고. 깨어지거나 베어짐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차가운 이성의 눈을 얻게 될 것이고, 우리의 혼은 성숙하게 될 것이라고.

학생은 알듯말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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