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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Sep 12. 2018

부러움이라는 고질병

- 극복되는 것, 되지 않는 것.

부러움은 두 가지 종류로 있다. 부러워서 부럽다고 할 수 있는 부러움과, 정말 부러운데 부럽다고 말 못하는 부러움. 사실 전자는 정말 부럽다기보다는 상대방을 치켜세워주기 위한 부러움에 가깝다. 후자 쪽은 나를 마음 속 깊이 힘들게 한다.


나는 부러움을 극복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했다. 부러움은 두려움과 비슷하다. 그 두 감정은 대부분 무지에서 온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과장하는 버릇을 타고났다. 우리가 과거보다 미래를 더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불확실하고, 흐릿하며,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우리가 부러워하는 대상은 대부분 불균형적인 모습으로 있다. 그의 빛나는 일면에 집중하게 될 때 우리는 다른 면도 그러하리라고 막연하게 상상한다. 그의 다른 면은 나와 같거나 비슷한 상태이고, 거기에 그만의 장점이 더해진 것이라고 예측한다.


몇 년 전까지 나는 부러움이 거의 습관에 가까웠다. 늦게 깨달은 사실이지만 자존심이 강한 편이어서, 부럽다는 말은 절대 내뱉지 않았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면 될 것을 마치 나의 모자람을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아서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속으로만 부러워했다.


부러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누군가 나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을 때였다. 둘만의 술자리에서 친구는 아주 조심스럽고 비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정말 부럽다.” 그 당시 나는 누군가를 치열하게 부러워하고 있을 때였고 아주 자존감이 바닥인 상태였다. 친구는 내가 부러운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고해성사같은 분위기였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너를 부러워했고, 그래서 너를 미워했다는 식의,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글로 표현이 어려울 정도였다. 내가 살면서 가장 낮은 자존감으로 누군가를 극성스럽게 부러워할 때, 같은 시기 나도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니.


드러난 면은 그대로 동경하고 드러나지 않은 면을 멋대로 상상할 때, 어떤 의미로 상대방은 괴물이 된다. 그걸 부러워하는 나 자신도 괴물이 된다. 나는 누군가 부러울 때마다, ‘그 사람이 되면 모든 근심이 사라질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무언가 나의 처참한 얼굴에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질 때. 박보검이 되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박보검이 되면 더 이상 외모로는 부러운 사람이 없어질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나는 아마 박보검이 되어도, 데인 드한이나 젊은 날의 알파치노나 에단 호크를 보면서 가끔 부러움에 빠질 것 같다. 김종국의 몸을 보면서 부러워할 것 같고, 정해인의 깔끔한 생김이 부러울 것 같다. 그러니까 박보검이 되어도 외모에 대해 부러워할 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박보검이 말도 안 되게 잘생긴 건 사실이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굳이 박보검이 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공무원으로 취직한 친구가 부러워도, 그 친구가 되면 더 이상 경제적인 면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까, 직업에 대한 회의를 느끼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당연히 아니겠지. 당장 내일 경찰공무원에 특채로 합격시켜준다고 해도 나는 결코 매일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국회의원이 되어도 대통령이 부러울 것 같고,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이 되어도 대국의 수장인 트럼프가 부러워지거나, 뜬금없이 잘생긴 박보검이 다시 부러워질 것 같다.


우리는 어떤 지위를 얻어도, 어떤 외모를 갖게 되어도 결코 완전히 행복해질 수 없다. 부러움은 부러워하는 한 끝나지 않는다. ‘부러움’은 부러워하는 사람만 얻게 되는 페널티와도 같다. 부러워하기로 하면 어떤 삶을 살아도 부러워진다.


그 불공평한 싸움에 참여하지 않기로 생각한 다음부터는 부러움이 많이 줄었다. 누군가가 부러워도 부럽다고 할 수 있을 정도 부러울 뿐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많이 성숙했다.


그런데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부러움이 있다. 나는 타고나게 선한 사람을 부러워한다. 도덕적인 사람 말고, 인간관계에 능숙한 사람 말고, 배려심이 많고 온화한 사람 말고, 그 자신 그대로 솔직하고, 때로는 화를 내면서도 품성 자체에 선한 기운이 배어있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건 노력으로도 가질 수 없는 경지다. 그냥 타고나게 주어진 것이라서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완전히 무력해진다. 극심한 부러움이 어떤 존경심 같은 것으로 바뀌어서 거의 접대하듯이 대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어떤 식으로든 나는 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뼈아파서 슬프기도 하다.


부럽다고도 못하는 부러움이다. '너의 그 타고난 선함이 부러워.'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살다보면 종종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완벽하진 않아도 매끄러운 인간관계를 하고, 자연스러운 실수를 하면서, 반듯하게 살아낸다. 이 또한 그들의 숨겨진 면을 미화하기 때문일까.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들이 그렇게 부럽다.


모든 부러움에서 벗어나서 나 자신으로 사는 일은 참 힘들다. 김애란 작가는 비행운이라는 소설집에서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라고 적었고, 가수 문문(지금은 볼드모트처럼 된)은 이를 ‘나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로 변형해서 노래에 담았다. 내가 좋아하는 쪽은 후자 쪽이다. 나는 겨우 나밖에 되지 못해서 슬프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부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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