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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Oct 08. 2018

경상도가 경상도인 이유

- 혼자 맞으면 가끔은 틀린 것이 된다.

군대에서는 사람들이 고립되어 있는 만큼 정보도 고립되어 있다. 각자 알고 있는 정보들이 충돌하는 경우가 생길 때, 사회에서는 간단히 스마트폰을 검색하면 되지만 군대에서는 그게 어렵다. 싸지방(사이버지식정보방의 줄임말로, 군대의 pc방)이 있기는 하지만 이용시간이 정해져 있었을 뿐더러, 내가 있던 부대에서는 그나마 컴퓨터의 대수도 극히 적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검색을 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보통은 집단지성을 이용했는데, 말이 집단지성이지 그냥 모든 걸 다수결로 해결하는 시스템이었다. 다수가 인정하는 정보는 대체로 정확한 편이어서 많은 경우에는 그 정도로도 문제없이 마무리 됐다.      

1급일수록 심한 장애다. vs 장애급수가 높을수록 심하다. / 금세가 맞다. vs 금새가 맞다. / 바르셀로나랑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는 갈락티코다. vs 엘클라시코다. / 마이클잭슨은 아동 성추행을 했다. vs 안했다. /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 vs 안 죽는다. / 면도를 하면 털이 굵어진다 vs 안 굵어진다.      등등.


한 두 명이 싸울 때는 옥신각신하다가도, 주변에게 물어물어 가다보면 대체로 진실이 밝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큰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또 우리 부대에는 교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현직교사로 2년간 일하다가 뒤늦게 입대한 ‘일병 김지훈’(당시 나이 30세, 별명: 선생님, 이유: 선생님이라서.)이라는 인원이 있었고. 그는 집단지성이 오류를 일으킬 때마다 이를 바로잡는 최종 심의기구 역할을 했다.     


그런데 항상 집단지성과 교사 출신의 병사를 통해 정보의 진위를 가리다보니 이것이 조금 변질되기도 했다. 정답이 뚜렷이 존재하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도 ‘다수결’ ‘선생님’의 판단으로 승패를 가려버리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없이 자신들의 ‘뇌피셜’로 심오한 주제에 대해서 격론을 나눌 때가 그랬다. 우리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심오한 질문에 대해서 고작 수십 명의 의견을 수렴하여 ‘달걀이 먼저다.’라고 간단하게 결론을 내는가 하면(나는 ‘닭’파였기 때문에 이 논쟁을 통해 약간 무식한 쪽에 속하게 되었다.) ‘메시가 낫냐, 호날두가 낫냐?’ 라는 문제를 ‘선생님’에게 물어 공신력을 확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다수 의견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강박을 조금 가지고 있는데, 바로 군대에서 있었던 한 사건 때문이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억울한 기억. 그 일은 ‘다수결’과 ‘선생님’이 네이버이자 구글이던 그때의 우리 부대에서 일어났다.     


고향이 울산인 선임이 있었는데, 나랑 별로 친한 편은 아니었다. 그 선임은 내가 서울에서 산다는 이유로 나에게 이상한 열등감 내지는 공격성향을 보였다. ‘서울 애들은 이래서 안 돼.’ ‘서울 애들은 약해 빠져가지고.’ ‘서울 애들은 끈기가 없어.’ 같은 말을 달고 살면서 유독 경상도 후임들을 챙기는 사람이었다. 학교에서라면 받아칠수도 있었겠지만 고달픈 군생활을 하기는 싫었으므로 나는 그 선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애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같은 말이 아침부터 이어졌다. 서울에 사는 것의 단점, 서울 사람들 특유의 정 없음에 대해서 선임은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걸어왔다. 한편으로는 천년고도 경주가 얼마나 훌륭한 도시인지, 서울보다 나은 경주의 장점에 대해서도 쓸데없이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언짢음을 억지로 숨기면서, 맞장구를 칠 요량으로 “경상도가 경상도인 이유도 경주랑 상주 때문이지 않습니까.” 라고 말했는데, 이게 문제가 되었다.      


선임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코웃음을 쳤다. “경주와 상주를 합쳐서 경상도라고 부른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때까지는 나도 자신만만했다. “진짭니다. 전라도도 전주와 나주의 앞 글자를 따서 전라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강원도는 강주랑 원주냐?”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를 따서 강원돕니다.”

조금 유하게 말했어야 할 것을 조금 무시하는 투로 반박했더니 선임이 열이 받았는지 나를 궤변론자로 몰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자고, ‘다수결의 판결’이 시작된 것이었다.    

  

자신만만했는데 의외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의견을 보태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내 생각과는 다르게 사태는 내 의견이 틀린 것, 선임이 맞는 것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 경기도는 경주랑 기주냐?” 라고 묻는 선임의 말에 내가 대답을 못한 것도 잘못된 여론 형성의 한 이유가 되었다. 다수의 의견은 ‘경주와 상주 앞 글자를 따서 경상도라고 이름 지었다는 건 묘한 우연의 일치.’라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3소대의 ‘선생님’을 찾아가는 것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선생님’도 몰랐다. 교대를 우수한 성적으로…<중략>…뒤늦게 입대한 ‘선생님’은 “일리가 있긴 한데, 처음 들어본다.”고 말했고 승부는 거기서 결정 났다. 나는 고집 세고 싸가지 없는 후임이 되었고, 의기양양한 표정의 선임은 ‘서울 애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를 발음하며 내 가슴에 스크래치를 한 번 더 냈다. 그날 나는 잠드는 순간까지 잔뜩 억울했다. 갈릴레이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가 글을 쓰면서 갈릴레이를 자주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음날 나는 줄을 서서 싸지방에 갔고, [경상도 경주 상주]를 검색했다. 경주와 상주의 앞 글자를 따서 경상도, 전주와 나주의 앞 글자를 따서 전라도… 경기도는 서울 ‘경’자에 임금의 땅을 나타내는 한자 ‘기’자를 써서 경기도라고 한다는 정보를 확인했다. 역시 내가 맞았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누르며 선임에게 달려갔다. 선임은 누워서 잡지를 보고 있었다.     


“황○○ 상병님. 지금 싸지방가서 검색하고 왔는데 경주와 상주 앞 글자 따서 경상도라고 하는 거 맞답니다.” 하 참.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게 유치하다.


나는 참회의 눈물과 진심어린 사과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민망한 표정쯤은 지어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선임의 반응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뚱한 표정으로 “그래? 근데 뭐 어쩌라고.” 할 뿐이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과 억울함으로 벙 찐 표정을 지으면서 그대로 서 있었고, 그 다음 선임의 말은 KO펀치로 날아왔다.    

 

“그걸 또 검색하고 왔어? 하여간 서울 애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깐.”     


내 인생에서 가장 억울한 사건을 꼽아보라면 이때의 일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모르면서 우기던 선임을 미워해야할지, 다수 의견도 틀릴 수 있다는 교훈을 준 점에 대해 감사해야할지 참 씁쓸하게 헷갈린다.     


혼자 맞으면 가끔은 틀린 것이 된다는, 그리고 사소한 것에 목숨 걸 필요 없다는 교훈을 내 뼈에 새겨준 선임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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