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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Oct 06. 2018

당신은 ‘좋아하다’를 설명할 수 없어요

- 소통의 어려움. 의미의 의미, 그리고 사랑.

영화 ‘해바라기’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너 진짜 적분할 줄 아냐?

어떻게 하는 건데?

미분 거꾸로 하는 거

그걸 누가 모르냐? 그러니까 거꾸로 어떻게 하는 거냐구

그냥 하면 돼

그럼 너 미분은 어떻게 하는 건 줄 알아?

적분 거꾸로 하는 거.     


미분과 적분에 각각 명쾌한 개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누군가 미분이나 적분을 물었을 때. 서로를 거꾸로 하면 된 말은 대단히 무책임한 설명이 된다.


사전이 때로는 무엇보다 무책임하게 작성된 텍스트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실제로 국어학자들이 게을러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모호성과 추상성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지금부터 잠깐 동안, 단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어린 아이가 사전을 찾아보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럽다.’

네이버 사전에 ‘괴롭다’를 검색하면 나오는 설명이다.

고통스럽다는 말이 이해가 잘 안되는 것 같다. 다시 검색해본다.

‘몸이나 마음이 괴롭고 아픈 느낌이 있다.’

고통스럽다의 설명. 괴롭다’는 말을 몰라서 고통스럽다를  검색했는데 ‘괴롭다’는 말이 나온다. 유일한 힌트는 ‘아픈 느낌’. 어쩔 수 없이 ‘아프다’를 검색해본다.

‘몸의 어느 부분이 다치거나 맞거나 자극을 받아 괴로움을 느끼다.’

여기서도 괴롭다는 말이 나온다. ‘괴로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괴로움’을 알고 있어야 하는 아이러.     


이번엔 ‘헤아리다’를 검색해보자.

‘수량을 세다.’ 라고 한다. ‘세다.’를 검색하면 ‘사물의 수효를 헤아리거나 꼽다.’ 라는 설명이 나온다. 세는 것은 헤아리는 것이고 헤아리는 것은 세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럼 다시 헤아리다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3번째의 설명, ‘짐작하여 가늠하거나 미루어 생각하다.’를 참고해본다. 짐작이나 가늠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정이나 형편 따위를 어림잡아 헤아리다.’ 짐작의 설명은 어림잡아 헤아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여전히 모호하다. 가늠하다를 검색해본다. ‘목표나 기준에 맞고 안 맞음을 헤아려 보다.’ 가늠하는 것은 목표나 기준을 헤아리는 것이라고 한다. 헤아리는 것은 세는 것인데, 세는 것은 헤아리는 것이고, 헤아리는 것은 짐작하고 가늠하는 것인데, 가늠하고 짐작하는 것은 무언가를 헤아리는 것이다.     


서운한 것은 아쉽거나 섭섭한 것이고, 섭섭한 것은 서운하고 아쉬운 것이며 아쉬운 것은 미련이 남아 서운한 것이라고 한다.      


사전에서 나타나는 무책임한 정의들은 이밖에도 차고 넘친다. 어떤 감정이나 개념을 겹치지 않는 표현으로 설명하는 일은 이렇게 어렵다. 애초에 영원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정의하려고 해도 정의되지 않는 단어 앞에서 우리는 무력하다. 사전에서 무책임하게 설명하는 단어들은 우리의 삶에서도 복잡하고 어려운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좋아하다’를 설명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우리는 좋아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사전에서는 거의 포기단계에 가깝다.

‘어떤 일이나 사물 따위에 대하여 좋은 느낌을 가지다.'

 좋아하는 것은 좋은 느낌을 가지는 것이라고 하니 보는 사람이 조금 더 민망해질 정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소통일 텐데, 그건 우리의 소통이 이렇게 무력한 언어의 몸을 빌려 나타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은 우리의 마음에서 가장 명확하지만, 그것이 입으로 나타나는 순간부터는 참 모호해진다.      


세상에는 각기 다른 수많은 언어가 있다. 성서에서는 이를 바벨탑의 저주로 설명한다. 교만한 인간들은 하늘 끝까지 닿는 탑을 쌓으려고 했고, 신은 자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것이 괘씸해 인간들의 언어를 나누어서 소통하지 못하게 했다고. 결국 원활한 소통 없이 진행된 공사는 탑이 붕괴됨으로써 슬픈 결말을 맞게 되었다.     


바벨탑의 저주는 모국어와 외국어에만 있을까. 사실은 내가 나의 마음을 설명하지 못하는 데에서, 또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소통하지 못하는 데에서 더 크게 느껴진다. 아마도 우리는 평생 ‘좋아한다’를 설명하기 위해 애쓸 것이고, 실패할 것이다. 영원히 완전한 소통에 실패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사전의 무력함이 우리의 마음에도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사랑에 목매는 것을 조금 이해할 수도 다. 사랑은 복잡한 설명 없이도 내 마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어쩌면 우리는 완전한 소통을 위해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다. 매번 실패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토록 모호한 감정과 무력한 언어 속에서 다시 한 번 사랑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완전한 사랑의 세상을 어렴풋이 상상해본다. 완전한 사랑의 세상에는 사전따위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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