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Oct 28. 2018

시간을 눈으로 보는 법

- 단어를 설명하다

익숙한 것일수록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저번에 비슷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사전에서는 '서운하다' 아쉽거나 섭섭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섭섭하다'를 검색하면 서운하고 아쉬운 것이라고 나온다. '아쉽다'를 검색하면 미련이 남아 서운한 것이라고 한다. 단어에 대해서 이제 막 알게된 어린 아이라면 이런 설명들 속에서 퍽 난감할 것이다. 단어들이 서로를 설명하고 있으니, 아무것도 모르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사전이라는 것이, 그리고 단어의 뜻을 단어로 설명한다는 것이 그렇게나 어렵다.


나는 심심할 때마다 단어의 뜻을 내 나름대로 정의해본다. 일종의 놀이같은 것인데, 아이고 재밌어. 하면서 하는 놀이는 아니고, 그냥 심심할 때 손가락 관절을 뚝뚝 꺾듯이 무심하게 하는 놀이에 가깝다.


어떤 단어가 떠오르면 먼저 그걸 검색해보고 사전적 정의를 확인한다. 명쾌한 경우는 많지 않고, 이 정도가 최선이라는 선에서 단어들의 뜻이 정리되어 있다. 편찬자의 주관이 너무 개입돼서도 안되고, 너무 길어서도 안되고, 설명을 위해 너무 많은 단어를 사용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조금 심심하고 모호할 때가 많다.


'사랑하다'는 사전(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다.

 

'사랑하다'에 대한 나의 정의는 이렇다.

어떤 존재를 나 자신보다 좋아하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 왜냐하면 이 세상과 우주는 결국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는 동안에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내가 없으면 세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랑은 '나  〉너' 의 관계를 '나〈  너'의 관계로 바꿔준다. 어떤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그것은 남이 먹는 것보다 내가 먹을 때 당연히 더 기쁜 법인데, 사랑은 나 자신보다 다른 존재를 더 좋아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 음식을 양보하고 싶게 만들어 준다. '내'가 먹는 것보다, '네'가 먹는게 더 기쁘게 된다.

나보다 네가 더 좋으니까. 내가 아픈 것보다 네가 아픈걸 보는 게 더 괴로워지고, 나보다 네가 더 좋으니까 무거운 짐도 대신 짊어지게 된다. 그 자신보다 사랑의 대상을 더 좋아할 때만이 대신 죽어줄 마음도 가질 수 있다.

나에게 완전한 사랑은, 스스로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다른 존재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래서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닐까.) 커져서 대신 죽어줄 수도 있는 상태이다. 어떤 존재를 나 자신보다 좋아하다. 라는 말로 사랑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간은 사전에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는 이렇다.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

틀린말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어딘가 조금 아쉽다. 나는 가만히 턱을 괴고 생각을 거듭해봤지만 마땅한 설명을 찾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상상을 했다. 불현듯 곧 태어날 조카가 떠올랐다.

나의 사촌 누나는 현재 임신을 하고 있는데, 내년 설 즈음해서 내 첫 조카가 태어난다. 그러니까 나는 그 조카를 떠올린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몇 해가 지나서 유치원을 다니거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쯤의 모습을 떠올렸다. 말을 곧잘 하고 호기심이 많은 아이의 모습.


'삼촌, 시간이 뭐야?' 조카가 나에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

시간이 뭐냐고, 시간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난감했다. 시간이란 어떤 시각과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를 말한단다. 라고 설명하면 조카는 이해할 수 있을까. 시각은 뭔데? 하고 물으면 다시 사전을 찾아보고서 시각이란 시간의 어느 한 시점을 말한단다. 라고 설명해도 될까.


나는 한참이나 머리를 굴려보다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아서 조금 문학적인 방법을 써보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했다. 냉동실에서 얼음을 하나 꺼내서 내 손에 올려놓는 것이다. 조금 차갑겠지만 꾹 참고. 조카랑 나란히 배를 대고 엎드려 누워서 그 얼음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다. 얼음이 천천히 녹아서 완전히 물이 될 때까지. 아마도 조카는 대단히 지루해하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얼음을 쳐다보는 일로 시간을 설명할 수 있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시간을 설명하는 데는 부족하지만, 시간을 눈으로 보는 법에 대해 발견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경상도가 경상도인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