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륜 말고 감독의 그
우리는 얼마나 죽어 있다가, 얼마나 살고, 또 얼마나 오랫동안 다시 죽은 채로 남는가. 생은 생으로 시작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왔다가 다시 죽음으로 가는 사이의 한 호흡에 불과하다. 홍상수는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고 영화 속에서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되뇐다.
그는 진짜 예술가다. 그의 다사다난한 인생만 봐도 그렇지만, 그런 인생을 온몸으로. 또 아주 정면으로 맞으면서 무심하게 걸어가는 모습에서 그의 면모는 더 확실해진다. 그는 세상의 통념, 규칙, 도의, 그런 것들을 사뿐히 무시하고 살아간다.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를 통해 변명하지 않고 영화로 말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그의 불륜이나, 다양한 영화들에서 반영되는(것처럼 보이는) 과거의 추잡하기까지 한 행동들은 대중에게 모범으로 권할 만한 것이 절대 아니기에. 그라는 사람을 평가하기에 다소 망설여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한편으로 그를 한 명의 예술가로만 한정해서 평한다면 여러모로 멋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죽은 사람을 팔아서 지금을 행복하려 하는 거니?
그러면서 염치도 챙기고, 잘한다.
그래 산 사람은 살아야 되고, 지금은 너무 귀한 거니까.
너희들이 부럽다. 별 거 아닌 것들. 다 죽을 거면서.
죽은 친구가 옆에 있어도 자기 죽을 건 생각 안하는 것들
그러니까 저렇게 단정하구나.
홍상수는 대중을(대중 속의 개인 말고, 대중이라는 익명의 집합을) 한심한 존재로 본다. 영화 속의 저 대사는 그렇게 고상한 척하는 대중을 조소하는 말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고상하지도 않으면서 대중이랍시고 무리 속에 숨어서 욕지꺼리나 내뱉는 것들.
그는 욕먹어서 기분이 나빴을까. 기분 나쁨에서 발하는 투정이 아닐 거다. 아마도 홍상수는 그저 유치해하는 것 같다. 그에게 인생이란 건 죽음과 죽음 사이의 허무한 호흡 같은 거라서 이렇든 저렇든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무의미한 결혼 생활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뭉개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느낀다.
아마도 그의 생각,
예쁘고 말 잘 통하는 김민희와 그냥 사랑할거야. 사랑해도 결국 죽고, 안 해도 죽는데, 그냥 사랑할 거야.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걸.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냥 사랑할거야.
그는 사랑의 위대함을 노래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그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감정이구, 감정은 너무 쉽구, 너무 힘있구, 너무 귀하구, 너무 싸구려구…”
사람은 결국 감정의 동물이라, 결국 감정으로 사는데 그건 너무 쉽다고 근데 너무 강력하다고 또 너무 귀하다고 때로는 너무 싸구려인데 너무 그립다고. 그는 말한다. 너무 그립다는 마지막의 말은
그래도 결국은 감정으로 살아. 사람은. 그렇게 들린다.
자신은 사람이 싱싱하게 피어있지만 곧 하찮게 지고 마는 것을 알아서, 모든 것에서 초탈한 채 감정으로 사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니까 그렇게 고상하고 단정하게 사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럽다고 말은 하는데, 진짜 부러워서 부러운 게 아니고, 그냥 너희처럼 한치 앞만 보면서 규칙이랍시고 자기를 다 숨기고 사는 그 객기아닌 객기가 부럽다고 말하는 것이다.
‘풀잎들’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느낀 건 그 부분이다. 그가 인생의 비밀을 알고 올바르게 살아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자신의 관점이 있고 대중이건 평가건 개의치 않고 예술가로서의 자신으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면에서 대단하다고 느낀다.
그 추잡하게 솔직한 그의 철학과 영화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여배우와 바람난 불륜 감독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쉽고. 단순한 방식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그저 나의 삶과 내 삶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그의 삶도 나의 삶도 결국은 한 줌 호흡일 뿐이니까. 그 호흡이라는 명사에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일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는 '허무한' 이라는 관형어를 사용했고. 나는 이해하면서도 동의하지 않기로 한다. 죽음은 생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만, 우리는 결국 죽음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생을 아름답고 단정하게 살아낼 필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