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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Nov 13. 2018

기억'되는' 대사들

- 영화 '러덜리스','첩첩산중'

어떤 대사는 기억'된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오래 머문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남지만 기억나는 장면은 별로 없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몇 장면이 또렷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별로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영화들 중에서 그런 장면을 담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종종 생각이 날 때마다 내가 그 영화를 좋아했었나. 새삼 돌이켜보게 된다. 그런 영화들은 다시 찾아볼 때에도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거나 하지는 않고 특정한 장면만 반복해서 보게 된다.


나의 아들이 6명의 학우를 죽이고 자살한 총기난사범이라면? '러덜리스'는 이런 내용의 영화다. 우리는 흔히 영화를 통해 가해자나 피해자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누가봐도 이견의 여지가 없는 악인이지만, 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보다보면 응원을 하게도 되고, 감정이입이 되는 경우도 많다. 피해자일 때는 더할 나위가 없다.

'러덜리스'는 둘 중 어느 것이라고 할 수가 없어서 특이한 영화다. 가해자인 아들의 아버지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인공인 '아버지'를 가해자라고 해야할지 피해자라고 해야할지 난감해진다. 가해자의 아버지니까 가해자에 가까울까? 아니면 본인에게는 죄가 없는데도 죄인처럼 살아야하기에 (실제로 영화속에서 아버지는 번듯한 직장을 잃고 일용직을 하며 작은 보트에서 은둔해 산다.) 피해자일까? 정답은 없다.


영화의 후반부, 아들의 과거와 관련된 문제로 아버지는 큰 곤란을 겪는다. 경찰서에 잠시 구금되는데 친하게 지내던 악기점 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차를 얻어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실은 그 총기난사범이 자신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다. 친구처럼 지내던 악기점 사장은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공연에서 부를 노래가 사실 아들이 만든 노래라고 고백한다. 악기점 사장은 어떻게 그럴수 있냐며, 그의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분개하며 말한다.


"남의 집 아들 딸을 자네 애가 죽였어."

그리고 그의 대사는 이렇다.

"나도 알지만... 내 아들이었잖아." (I know... But... He was my son...)


그는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변명하지 않는다. '우리 애가 친구를 잘못 만나서 그래요.'라거나 '원래 심성은 착한데 우울증이 심했어요.'라거나, '우리 애를 왕따시킨 애들이 더 나빠요'라는 말은 절대 내뱉지 않는다. 그는 아들의 잘못을 정확하게 알고 그냥 죽은듯이 지낸다. 그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빠로서 그저 아들을 가여워한다. 그는 아들이 완벽한 악인으로 죽어서 아무에게도 추모받지 못해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혼자 남아있는 사람이다. '우리 아들이 잘했다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애가 제 아들이잖아요. 어쩌겠습니까. 걔는 내 아들이에요.'

영화가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가족이 무고한 사람을 여러명 죽였다고해서 돌을 던질 수 있겠어요?

자동차 안에서 울먹이면서 '내 아들이었잖아'를 반복하는 아버지의 말이 너무나 슬퍼서 나는 저 장면을 여러번 돌려보았다. 저 표정과 목소리는 거의 각인되다시피 머리에 남아있다.


*


보고나면 불쾌해지는 영화가 있다. 홍상수의 '첩첩산중'은 불쾌를 넘어서서 아주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영화다. 보다보면 한심하고 뻔뻔하고 추한 인물들의 모습에 한숨이 쏟아지다가 헛헛한 웃음이 허탈한 모양으로 터져나온다. 30분 짜리 짧은 영화인데(네이버TV에서 무료로 배포중이라 언제든 볼 수 있다.), 스토리가 정말 가관이다. 사실 너무 막장이라 정말 재미있기도 하다.


친한 언니를 만나고 그 집에서 하룻밤 묵을 계획으로 전주로 내려간 주인공은 언니의 사정으로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스승이자 부적절한 관계였던 상옥(문성근)에게 연락을 하고 둘은 만나서 술을 먹다가 모텔에 간다. 잔다. 그러다 친한 언니가 스승과 연인관계라는 것을 알게된다. 배신감에 작가가 된 옛 남자친구명우(이선균)를 불러내고, 그 둘은 다시 술을 마시다가 엉겁결에 키스를 하고, 모텔에 간다. 다음날 모텔에서 나와 밥을 먹으려는데 모텔에서 나오는 스승 상옥과 언니를 식당에서 만나게 된다. 각자 테이블에서 상대 커플을 의식하면서 어색하게 밥을 먹는다는 이야기. 영화 무안해진 문성근이 인사를 안한다고 호통을 치면서 끝난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사이사이의 대사가 촌철살인이다.

 

명우가 미숙을 만나러 오고, 세 사람이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미숙(정유미)은 술을 억수로 들이붓는다.

언니는 그만 먹으라는 투로 말한다.

"너 왜 이렇게 술마셔?"

미숙(정유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이유가 있어 마셔? 언닌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것 같애? 너 이유가 있어서 섹스하니? 그냥 하고 나서 이유 붙이는거야. 아니야? "

 

이 대사, 처음 들을 땐 그냥 재밌었는데 보고나서는 가볍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리는 어떤 행동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지만 사실은 반대인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어떤 말싸움에서, 우리는 각자 화난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지만, 실제로 그 자잘한 이유들이 싸움의 원인은 아니었다. 화가나는 이유는 너무 유치하거나 사소해서 별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대외적인 이유들은 나중에 몸집을 키운다.


'만날 때는 이유가 없더니 헤어질 때는 이유가 덕지덕지 붙어서 슬픈 거래요.' 사랑에 관한 영화의 댓글창에서 언젠가 이런 짧은 글을 보았다. 나는 깊이 공감했다. 그러니까 꽤 많은 경우 이유는 나중에 있다. 이유는 우리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같은 것이다. 사람은 늘 자신에게 그럴듯한 이유를 부여하고, 상대방의 이유에는 보통 관심이 없다. 사람의 이기심그런 못된 버릇을 만들거나, 아니면 그런 못된 버릇이 이기심을 만드는 것일 게다.


30분 동안 휘몰아치는 더럽고 치사한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지난 나의 인간관계 속에서의 다툼들과, 연애같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그래 나에게는 항상 이유가 있었지.' '너에게도 늘 이유가 있더라.' 중얼거리면서 부끄러워했다.

나는 저 장면과 대사를 종종 다시 찾아보고 들으면서, 재미있어 한다. 대사를 외웠다. 누가 나한테 왜 그렇게 술먹냐고 물을 때 한 번 써먹어 볼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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