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리뷰
란제리 회사에서 남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야한 속옷'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속옷은 망사도, 호피도 아닌 흰색 속옷. 야하면서도 청순한 디자인을 한 흰색의 속옷이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점은 청순한 속옷의 선호도가 높았다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이 야하면서 청순한 것을 원했다는 데에 있다. 야한 속옷과 그냥 심플한 흰색 속옷 중에서는 야한 속옷의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야한 속옷'이면서 '청순한'느낌이어야 한다니. 양립할 수 없는 성적 매력의 선호는 남자의 모순된 판타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잡지에서 보았어서 지금은 출처를 찾을 수도 없고 무한정의 신뢰를 보낼 수도 없지만 당시 글을 보면서 나는 공감의 마음으로 큭큭 웃었다. 약간의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리뷰에서 웬 속옷 얘기냐 하겠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 영화야말로 '청순한 흰 색의 야한 속옷' 같다고 정의할 수 있을만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총평을 한마디로 하자면 '유치한 로맨스'정도가 되겠으나 사실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겉으로는 시한부 소녀와 미숙한 소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음침한 남자를 위한 판타지만 가득하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너무하다 싶을 정도다. 단 한 번이라도 연애를 해 본 사람이라면, 이토록 허무맹랑한 사랑이야기에 마음이 동하지는 않으리라.
일본 애니메이션이 체질과 맞지 않는 편이라 많은 작품을 접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보았던 아주 유명한 영화들만 한정해서 보더라도 일본 만화계의 여성관은 심각한 수준 같다. '늑대아이', '너의 이름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같은 영화들에서 여자는 저능아에 가까워보일 정도로 대책없이 밝고 순수하다. 그들이 그리는 여성은 페미니즘이나 여성인권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지나친 역할 강요에 가깝다. 꾸준히 등장하는, 치맛속이 보일듯 말듯한 아슬아슬한 각도의 쇼트만 봐도 그 뻔한 속셈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나는 야한 것을 아주 좋아하는 남자지만 그런 식의 저급하고 유치한 연출에는 반감만 생긴다.
'너의 췌장을' 에서 여자 주인공 '사쿠라'는 해맑고 순수한 단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그야말로 이데아를 구현한다. 착하고 밝지만 가볍지만은 않고 우울함은 있어도 내색하지 않는 사려깊음이 있다. 순수하지만 남자 주인공에게 1박2일 여행을 제안할만큼 과감하며 호텔에서는 성적인 매력을 도발적으로 발산한다. 스킨쉽을 유도하거나 먼저 실행하는데 능숙하기까지 하다. 춤을 추다 걸리면 부끄러워하는 수줍음이 있고, 불꽃놀이를 보러가자고 하는 낭만이 있다.
그에 비해 남자는 어떤가 하면, 친구도 없고 인간관계에도 서툴다. 머리는 덥수룩하고 몸은 왜소하다. 무뚝뚝함 그 자체다.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넬줄 모르고 따뜻한 웃음도 지을 줄 모른다. 용기도 자신감도 없다. 유일한 매력이라면 선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 편견없는 마음과 솔직함을 가졌다는 것 정도다.
타인의 병을 알고서도 허튼 위로나 동정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저렇게 맹목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인가. 30대 후반의 노처녀에게 대기업 상무가 홀딱 반해 모든 것을 버리고 돌진하는 구태의연한 옛날의 한국 주말드라마처럼. 이 영화는 안일하고 모순적인 설정으로 가득하다. 사회의 관계 속에서 버림받고 히키코모리를 자처하는 자들에게 이 이야기는 몹시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들에게만 유효한 이야기라면 그 가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나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 이 영화를 돈주고 보느니 황순원의 '소나기'를 열 번 반복해서 읽는 편이 백 번 낫다.
예술적인 측면에서는 과도한 친절이 문제다. '너의 췌장을' 속에서 관객이 상상해야 할 부분은 거의 다 막혀있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모든 감정과 행동의 내막이 설명되거나 보여진다. '그렇겠군.' '그런 것이였군.' 이 아니라 '그렇다는 구만.' 으로 간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막판 20분 정도는 그냥 속마음을 서로 줄줄 읽어주면서 지금까지의 사랑과 그들의 관점에 대해 아주 친절하고 세세하게 풀어준다. 숟가락으로 다 넣어줄테니 입만 벌리라는 식이다. 진부한 '어린왕자' 메타포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그저 제목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라는 제목은 힙하고. 발칙하고. 신선하다. 제목만으로도 영화나 소설을 한 번 보고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좋은 제목만큼의 책임감을 가졌더라면 이보다 훨씬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얄팍한 제목만으로는 채울 빈틈이 너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