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영화가 유치해지는 과정
근래 한국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두 가지다.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나 훌륭하다는 것과, 상업영화의 연출에 발전이 없다는 것. 연출이 발전하는데 연기가 여전히 형편없는 것보다야 연기의 수준이 높아지는 편이 낫겠지만 아무래도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천편일률적인 시나리오작법에 기대고 있는 각본과 상업공식에 따른 연출 문제는 사실 새로울 것도 없다. 영화 제작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지만 아마도 제작, 투자의 단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일 것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작가들과 야망있는 감독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영화 제작의 특성상 대단한 성공을 노리기보다 실패하지 않는 데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가부도의 날’은 아쉬운 연출과 훌륭한 연기가 만난 또 하나의 사례다. 배우들은 자칫 어색하기 쉬운 대사들도 연기력으로 훌륭히 커버한다. IMF 당시의 위기상황과 현실을 관객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설명적인 대사를 많이 삽입할 수밖에 없다. 배우들은 그 길고 심심한 대사들에도 깊게 몰입해서 일체의 거부감도 없게 만든다. 유아인의 연기는 항상 조금 과잉인듯 싶지만 그것도 배우 나름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주연부터 조연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에서 발연기는 없다.
그럼에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건 결국 연출의 문제다. ‘국가부도의 날’에는 몇 가지 단점이 두드러진다. 지나치게 설명적이라는 것, 힘 빠질 정도로 허술한 엔딩을 가졌다는 것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역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안일한 인물 설정이다. 영화에서 모든 캐릭터들은 심하게 전형적이고 평면적이다. 선과 악을 너무 뚜렷하게 갈라놓은 덕분에 퀄리티 높은 ‘신비한TV 서프라이즈’를 보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는 무슨 고전소설도 아닌 것이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을 극단적으로 뚜렷하게 갈라놓는다. 국가부도의 위기상황에 한 쪽은 정의를 말하고, 한 쪽은 비열함으로 일관한다. 실제로 그랬을까. IMF 구제금융 신청은 나라를 의도적으로 전복시키기 위한 고도의 노림수였을까. 치열한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 한치 앞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꽤 많은 전문가들이 고민했을 것이다. 대기업과 결탁한 경제수석이 IMF를 찬성한 것이 아니라, 대안 없는 상황에서의 차악을 선택한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 나눌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각자의 경제철학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상황 속에서의 갈등을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몰아가버리는 탓에 영화는 유치해진다. 관객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의도적으로 나라를 말아먹으려는 악한 위정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정의감 넘치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의 이야기에는 어떤 깊이도, 생각할 거리도 없다.
끝까지 무엇이 정답인지, 어떤 선택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선택의 어려움을 공감하게 하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대한민국의 재정국 차관이 협상 테이블에서 비열하게 웃으며 나라가 망하기를 기원하는 모습은 너무나 영화적이다.
영화를 더 딱딱하게 만들면 안 팔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이 작품의 퀄리티는 답습에 그치고, 결과적으로는 안전하게 망하는 길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완벽한 타인’의 성공은 상업코드의 극대화가 아니라 뚜렷한 색깔과 탄탄한 각본의 힘에서 왔다. 요즈음의 한국영화는 모두 사악한 기득권과 정의로운 소시민의 대결구도에 너무 매몰되어 있다. ‘베테랑’과 ‘내부자들’을 재탕삼탕하는데 급급한 느낌.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 걸맞는 세련된 연출을 기대한다. 흥행을 위해서는 오히려 안일한 인물 설정과 고리타분한 공식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