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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Nov 22. 2018

그는 죽었고 글은 살아있네

 예술 속에서

 세상에 단 한 문장의 진리만을 남겨야 한다면 ‘모든 것은 죽는다.’가 될 것이다.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단지 그것밖에 없다. 모든 것은 죽거나 사라진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풍화되어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예술만은 영원불멸하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쪽이지만 결국 예술마저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만 덧없는 생명의 길이에 비해서 예술은 영원불멸하다고 해도 될 만큼 오래 남는다. 삼십년도 살지 못했을 누군가가 만든 몇 십년 전의 빗살무늬 토기도 아직 남아있는 것을 떠올려 볼 수 있듯이, 예술은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오랜 시간의 자취다.     


죽은 사람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알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사실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기도 하다. 예술 속에서 실시간으로 살아있는 내 눈 앞의 모습과 그가 이제는 죽어있다는 ‘사실’사이의 부조화가 주는 감정. 나는 그런 마음을 느끼면서 조금 슬퍼하고 때로는 매료된다.     

얼마 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태풍이 지나가고’를 보면서 그 속에서 인자하고 귀엽게 어머니 역을 소화하는 키키 키린의 연기를 인상 깊게 보았다. ‘걸어도 걸어도’를 볼 때만 해도 살아계셨는데, ‘태풍이 지나가고’를 볼 때에는 돌아가신 상태였다. 영화 속 그녀의 모습은 조금 더 늙어있다는 것 말고는 여전한 모습이었는데, 현실 속의 그녀의 존재란 생전과 아득히 멀고 멀어졌다. 그래서인지 화면 속에서 현현히 살아서 연기하는 모습이 그렇게나 생생한데도 나는 그녀에게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느낄 수가 있었다. 순전히 그녀의 부고를 전해들었다는 사실로 생긴 감정이었으나 무시할 수 없게 마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비키지 않았다.     

*

좋아하는 작가라고까지 하기에는 민망하지만(2권을 읽은 것이 전부이므로) 나는 황현산 작가의 책을 좋아한다. ‘밤이 선생이다’라는 수필집을 그가 돌아가시기 반 년 전에 접했다. 그 책으로 황현산 작가를 알게 되었고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그 책을 아껴 읽었다. 몇 편은 필사를 했고, 몇 편은 육성으로 녹음을 해서 일 하러 가는 지하철에서 듣기도 했다.


얼마 전 작가는 돌아가셨고 지금 내 침대 맡에는 그의 마지막 책, ‘사소한 부탁’이 몇 달 째 있다. 날름 읽기 아까워서 그랬다. 더디 읽고 싶은 책이었고 그만큼 아껴 읽었다. 마지막 3편 정도를 두 달 정도 남겨두었다가 오늘 다 읽어 냈다.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있을 때 쓴 글은 그의 존재를 의식하는 순간 묘한 기분으로 겹쳐진다. 글은 살아있고 그는 죽어있다는 사실이 참 낯설게 느껴진다. 모든 살아있는 자들의 글은 과거의 기억으로 종이에 멈춰 있는 듯 한데 반해서 죽은 사람의 글은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죽은 그의 영혼이 글자로 이식된 것 마냥 무게감이 있다.    

 

이는 순전히 죽은 예술가와 물리적인 예술 표면 사이에서 주관적으로 느끼는 찰나의 감정일 뿐이지만 감정은 늘 귀하고 예술은 감정을 일깨운다. ‘예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삶과 죽음, 두 가지 밖에 없지 않으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그래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소한 부탁’의 가장 마지막 글은 시인 장석남에 대한 글이다. 2017년 12월 23일에 쓰인 글. 그는 책의 가장 마지막 글의 마지막 문장에 ‘장석남은 새해에 쉰셋이 된다.’라고 썼다. 그리고 그는 장석남이 쉰셋이 된 올해 2018년 눈을 감았다. 쉰셋의 장석남 시인과 스물일곱의 나와 죽은 황현산 작가가 그 마지막 문장으로 겹쳐지는 듯 했다.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사실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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