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의 미라이' 개인의 역사 or 역사속의 개인
첫째 아들 ‘쿤’은 여동생 ‘미라이’가 태어나면서 찬밥신세가 되었다고 느낀다. 서운함과 혼란을 겪는 ‘쿤’에게 어느 날 미래의 미라이가 찾아온다. ‘쿤’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겪어 시공간을 초월하며 과거와 미래의 가족들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와 미래의 가족들과 추억을 나누며 어린 ‘쿤’은 한걸음 성장하게 된다.
“우주(형의 이름) 저 놈이 엄마만 사라졌다하면 우빈이를 밟더라니까.”
외삼촌은 스무 살 무렵 창원에서 잠시 상경해 서울에 있는 우리집에서 몇 달 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어머니를 도와 조카인 우리를 돌보면서 생긴 에피소드가 적지 않아서 지금도 명절이면 새로운 얘기를 풀어낸다. 영화 속 ‘쿤’처럼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형은 나의 탄생과 함께 찬밥신세가 되었다고 느꼈는지 어머니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나를 그렇게 꼬집고 때렸단다. 그게 우리 집만의 일은 아니었으리라.
모든 형제, 자매는 어릴 때부터 한동안 서로의 가장 살벌한 라이벌이 된다. 한 가족, 우리 편이라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고 맛있는 걸 나눠먹어야 하는, 자꾸 뭔가를 양보해야하는 불편한 동거인으로만 존재한다.
중학교 때까지는 형과 거의 하루걸러 싸웠던 것 같다. 진이 빠질 정도로 싸웠다. 대개는 내가 두 살 위인 형에게 맞고 펑펑 우는 방향으로 끝이 났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고자질을 하고, 퇴근한 어머니는 형과 나를 공평하게 때리셨다. 옷걸이, 자, 구두주걱, 우산 등 각종 도구로 다양하게도 맞았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동생이 생겼을 때 첫째가 느끼는 심리를 ‘폐위된 왕’에 비유했다, 어릴 때는 형이 마냥 미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등장으로 첫째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을지 측은한 마음도 든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아기가 자기에게로 향하던 모든 관심을 빼앗아가 버렸으니,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다.
외동이 아니라면, 영화 속의 그 신경전 혹은 전쟁에 대해서 가슴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첫째는 첫째대로, 둘째는 둘째대로. 아련하고 안타까운, 그러면서도 사랑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된다.
가끔 앨범을 꺼내 펼쳐보게되는 날이 있다. 보통은 시험기간이거나, 처리해야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때다. 대학교 4학년의 어느 날. 그때도 뭔가 제출해야할 레포트가 코앞까지 닥친 때였다. 훈련소에서 썼던 일기가 갑자기 궁금해서 책장을 뒤지다가, 앨범이 눈에 띄었다. 먼지가 가득 앉은 앨범을 보기 시작하는데 이름 모를 산 정상에 한 무리의 청년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보였다. 입이 떡 벌어졌다. 곱슬머리, 꿈틀거리는 것 같은 팔 근육, 활짝 웃고 있는 ‘장발’의 사내.
출생이후로 내가 본 아버지의 모든 헤어스타일은 전형적인 스포츠 머리였다. 미용실에서 내가 구레나룻을 시원하게 밀고 울상으로 돌아올 때마다 ‘머리 예쁘게 잘 잘랐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에게도 ‘장발’의 시절이 있었다는 건 정말 충격적이었다. ‘말 더럽게 안 듣게 생긴’ 아버지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보고서 어쩐지 나는 동생을 보는 것 같았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나보다 어렸으니까 절반은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모두 아이로 태어나서 어른이 된다. 쿤의 여동생 미라이는 영원히 쿤의 여동생이겠지만 현재의 쿤은 미래의 미라이보다 어린 존재다. 시간은 상대적인 거니까. 같은 원리로 우리는 어린 부모님보다 늙었고, 늙은 자식보다 어린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을 널뛰듯이 건너면서 누군가의 미숙함과, 성숙함을 가늠해보면 우리가 결국에는 모두 똑같은 질량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알게 된다. 때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미숙했다가, 성숙해진다는 말은 시간의 엄숙함을 깨닫게 한다. 그런 생각은 또 우리에게 작은 겸손을 선물하기도 한다.
호소다 마모루의 ‘미래의 미라이’는 헐리우드의 ‘인사이드 아웃’과 여러모로 닮았다. 하지만 둘을 같은 영화라고 부를 수는 없다. 영화가 개인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세계관에서 비롯한다. 두 영화는 모두 유년기의 갈등을 통한 개인의 성장을 공감의 영역에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영화를 마무리 짓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인사이드 아웃’이 통과의례를 거치는 주인공 개인에 집중한다면, ‘미래의 미라이’에서는 한 개인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뿌리를 더듬어간다. 전자가 ‘개인의 역사’라면 후자는 ‘역사속의 개인’을 말하는 것이다.
동양은 예로부터 ‘관계’에 큰 가치를 두었다. 서양은 ‘개인’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서양은 우주를 텅 빈 공간으로 보았고, 동양은 기로 가득 찬 공간으로 보았다. 그래서 우주속의 모든 물체는 서양에서는 독립된 존재였지만, 동양에서는 기로 이어진 존재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 세계관은 동서양 DNA에 거의 이식되어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서양이 그 범죄자 개인의 기질이나 성향에 집중한다면 동양의 경우에는 환경이나 상황의 요인에 더 관심을 보인다. 하나의 범죄도 서양에서는 개인의 책임이 되지만 동양에서는 사회의 책임이 된다.(경향적으로) 버지니아 대학에서 조승희가 총기난사로 수많은 미국 대학생들을 죽였을 때, 많은 한국인들은 그에 대해 대신 사과했지만 되려 미국인들은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례도 있다. 한국인이 조승희를 한국인이라는 전체속의 일부로 본 반면, 미국인은 조승희를 하나의 개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쿤’은 개인적인 성장을 겪어나가지만, 자신의 성장에는 무수한 우연과 인연 또한 있음을 깨닫는다. ‘미래의 미라이’에서 개인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아버지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의 어머니들이 겪은 무수한 사건들의 결과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인사이드 아웃’과 ‘미래의 미라이’는 상호 보완적인 영화라고 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기도 하지만, 우주를 구성하는 일부로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자신을 대입하면서, 또 내가 알지 못하는 우리 가족의 역사를 가늠해보면서 볼 수 있는 괜찮은 영화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늑대아이’에 비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호소다 마모루 특유의 따뜻함이 잘 살아있는 사랑스러운 영화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