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생존자의 용기가 아니다
2000년 8월 12일. 군사훈련 도중 핵잠수함인 쿠르스크 호가 침몰했다. 적재된 어뢰가 폭발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승조원 118명은 파괴된 배와 함께 수심 100m 깊이로 가라앉았다. 폭발점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선원들은 즉사했고, 일부는 격실에 갇혔다. 기약없는 구조를 기다리던 생존자들의 이야기.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이들이 구출되었는지 끝내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통해 확인하는 편이 좋다.
가라앉은 배, 군 당국과 정부의 늦장 대응, 구조를 기다리는 생존자들. 우리에겐 익숙한 스토리다. 세월호와 놀랍도록 닮은 쿠르스크 함 침몰은 2000년 발생했다. 세월호 참사가 2014년에 있었던 일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놀랍고 어떻게 보면 놀랍지도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 놀라운 것은 14년 전에 이미 선례가 있었음에도 그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고,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만 놀랍지 않은 이유다.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 나는 롯데월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는데 식당에 있는 대형 TV에서 세월호 사고가 중계되고 있었다. 생존자 전원 구조. 라는 자막이 뚜렷이 보였다. 밥을 먹던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학여행 가는 길에 배가 기울었대.” “다 구조 됐대. 다행이다.” 배가 학생들과 함께 가라앉고 있는 사이 놀이공원에는 웃음만 가득했다. 어느 곳에서는 사람들이 행복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어느 곳에서는 말 그대로의 비명이 있었다. 나는 그날을 되돌아볼 때마다 아주 이질적인 기분을 느낀다. 퇴근 후에 다시 뉴스를 봤는데, 전원 구조되었다던 학생들이 여전히 갇혀있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아이들이 눈앞에서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 죽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내가 진정 슬펐던 것은 나중에 몇 개의 동영상이 공개되었을 때였다. 기울어진 복도에서 여학생들이 남긴 영상이었다. 두려움에 벌벌 떠는 모습이 아니라, 당연히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해서 죽음에 무감하던 그 천진한 표정이 슬펐다. 앞으로 닥칠 재앙을 예감하지 못하고 장난을 치고 웃으면서 예쁜 표정을 짓던 아이들. 무서워서 우는 친구를 바보 같다고 놀리는 그 아이들의 모습에 눈이 뜨거워졌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면서 영화 ‘쿠르스크’를 보았을 때, 이전의 재난 영화를 볼 때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껏 재난 영화가 주는 교훈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을 때 살아남는다는 것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고, 동료들을 돕고, 강한 정신력만 붙들고 있다면 살아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영화를 보는 나도, 지난한 구조작업에 안타까워하면서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주인공들의 처지에 나를 대입하곤 했다. 혹시 저런 상황이 닥치더라도 나는 생의 의지를 가지고 끝까지 이겨내야겠다. 그런 마음을 다지곤 했었다.
이하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호와 ‘쿠르스크’를 겹쳐보면 새로운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생존자의 용기가 아니라 구조자의 용기다. 중요한 것은, 비판과 비난의 두려움을 이기고, 복잡한 책임 소지의 리스크를 기꺼이 떠안고 결정할 수 있느냐였다. 물질적, 정신적 데미지는 나중의 문제로 넘기고 일단 최대한의 목숨을 살리는 결정.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용기. 가라앉은 세월호와 쿠르스크의 생존자들은 모두 사망자가 되었다. 러시아와 우리에게는 그런 용기가 부족했던 것이다.
중증외상센터를 진두지휘하는 이국종 교수의 저서 ‘골든아워’에는 우리가 무게감을 가지고 살펴보아야할 에피소드가 여럿 있다. 아덴만여명작전 과정에서 석해균 선장이 해적에게 총상을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이국종 교수는 자신의 대원들을 데리고 오만으로 날아갔다. 외과 수술을 위해서 환자를 한국으로 한시바삐 이송해야 했는데, 절차는 복잡했고 예산은 부족했다.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국종 교수는 직접 지급보증을 서서 영국의 에어엠뷸런스를 빌렸다. 국내의 수송선을 요청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공군 측은 불허했고, 정부는 예산문제로 어물어물했다.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 앞으로 지출 없이 일해도 수년 안에 갚을 수 없는 큰 액수였지만 그는 일단 환자를 살리기로 결정했다.
정부와, 군관계자가 망설이는 사이 이국종 교수는 그런 용기를 내서 생명 하나를 살렸다. 그와 같이 단 한명의 용기만 있었다면 세월호는 참사가 아니라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쿠르스크’는 극장에서 볼 이유가 있는 영화다. 선실에 갇혀있는 그들의 모습은 어둡고 밀폐된 극장과 연결된 듯이 느껴져서, 마치 함께 갇혀있는 듯한 기분마저 준다. 선실의 전력이 차단되어 어두워질 때마다 깊은 바다 속 갇힌 작은 격실과, 극장은 한 몸이 된다. 나도 그들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내려올 때, 하나같이 축 쳐진 어깨와 참담한 표정으로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비극에 대해 가슴 깊이 느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