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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an 29. 2019

별이 총총한 하늘 밑 초소에 서서

- 복무일기

별이 총총한 하늘 밑 초소에 서서     

 

2012년 4월 (일병)

    

냄비, 냄비, 냄…비, 냄비-, 내애앰-비

어느 순간 익숙한 단어가 낯설어질 때가 있다. 학술적으로 게슈탈트 붕괴라고 한다는 말을 책에서 본 적이 있다. 밤을 꼬박 새우는 해안경계증원을 가는 김포 구불길에서 내가 쓴 방탄헬멧, 총, 전투조끼, 뭉개지며 멀어지는 풍경 모두가 갑자기 낯설어지는 어느 날이었다. 냄비라는 단어처럼 그 날은 군인신분으로서의 하루 전체가 게슈탈트 붕괴되는 기분이었다. 두돈반 군용트럭 뒤에 앉아 덜컹거리며 낯설었다.

예광탄 3발 보통탄 12발 두 탄창을 조끼에 끼우고 세열수류탄의 내용물을 확인하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붕 떠있고 눈에 비치는 모든 장면에 리얼리티가 느껴지지 않았다.

3인 1개조로 초소에 자리를 잡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서늘한 바다 위를 그저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두운 바다였다.

어둡고 찬 바다는 땅덩이를 머금고 있는 짐승처럼 느껴졌다. 만조가 가까워질수록 그 아가리는 나를 향해 점점 더 가까워졌다. 모든 뭍을 삼킬 것처럼. 여전히 나의 소총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바람도, 물결도, 옆에서 조는 내 사수도 그대로였지만 시계는 부지런히도 움직이다가 내일을 오늘로, 오늘을 어제로 표시했다. 달의 인력 때문인지 부지런히 부는 바람 때문인지 바다는 점점 가까워졌다. 하늘엔 무수한 별이 떠 있었다. 그래, 김포에는 별이 참 많구나. 혼자서 한 번 중얼거렸다. 야간투시경을 집어 하늘을 보면 별은 몇 배나 더 많이 보였다. 조용하고 외로운 초소에서 많은 생각이 들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무감각해지고 멍해졌다.

내가 그때 왜 그렇게 얼빠진 돌멩이가 되었냐면. 하늘의 별하고 내가 같은 것만 같아서였다. 별이 거기에 왜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여기 왜 있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혈관을 지나가는 자동차는 목적을 가지고 계속 지나가는데, 하늘의 별하고 나는 계속 서 있었기 때문에.

그래 사실은 조금 슬펐을 것이다.     


또다시 전역자를 보내고     


2012년 12월 (상병)     


전역자의 뒷모습을 보는 일은 징병된 군인이라면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옷을 입고 옆에서 잠을 잤대도, 위병소 밖을 나가는 그는 이제 나와는 다른 입장이다. ‘꼬우면 군대 먼저 오든가.’하는 말은 진리로 느껴지지만 군대 일찍 왔어도 그 뒷모습은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을 것이다.

21개월을 나라에 헌신한 것 치고 그 마지막은 별 대단할 것도 없어서 차라리 쓸쓸하다. 가는 사람은 가고, 어차피 나머지는 자신의 군생활을 한다.

이것은 일종의 죽음이다. 하나의 사회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그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적어도 군대 내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모두 그 죽음을, 떠나는 시체를 부러워마지않는다.

나는 또다시 내 곁을 떠나 사회로 가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부러움 만은 아닌 다른 무엇을 느꼈다.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마냥 신나지 않았다. 위병소 밖이 무한정 따뜻하고 한없이 포근하지 않다는 것을 그 뒷모습이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는 막연하게 두려워했다. 나도 그러했다.

나는 떠나는 전역자를 잠깐은 부러워하면서도 다시 나의 생활관으로 돌아오는 언덕에서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을 느낀 것 같다.     


거리의 나날     


2013년 2월 (상병)     


휴가를 나가고 보니 세상은 참 변함도 없었다. 버스정류장의 구조가 좀 바뀌었다든가 몇몇 가게 점포가 바뀌긴 했어도 큰 배경은 입대 전과는 별로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는 별개인 세상을 구경하듯이 이곳저곳에 시선을 두고 조금은 어색한 몸짓으로 풍경 속에 녹아들면서 집으로 가는 내내 내 마음속은 새로운 설렘으로 가득했다. 군인에게 사회란 항상 그 설렘으로 가득 찬 곳이다.

그런 설렘은 따지고 보면 내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지 밖의 건물이나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닐 텐데도 나는 마치 그런 듯이 주위를 의식하며 걸었다.

신기하게도 집에 도착해서 전투복을 벗고 핸드폰을 개통하고 나면, 그 설렘이 붙잡을 수 없이 흩어져 이내 곧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느꼈던 설렘이 내 마음속에도, 사회의 건물에도, 지나는 사람들에게서도 나온 것이 아니고 사실은 내 전투복에서. 거기에 닿아있는 피부의 표면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복을 입고 왼쪽주머니에 핸드폰을,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거리로 나섰을 때 나는 2011년 10월 이전의 나로 돌아갔다. 귀에는 2011년 10월 이전에 줄기차게 듣던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내가 걷던 거리도 딱 그때의 모습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9박10일의 휴가 기간 동안 나는 서대문과 독립문, 신촌 거리를 쏘다녔다. 거리 곳곳에는 내가 만든 생의 추억이 그대로 남아 나를 머금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내가 기억하는 만큼 거리도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멍하니 있을 때. 그 은근한 기분이 거리의 온도와 거기에 닿아있는 내 피부의 표면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나는 다시 한 번 느끼고서 웃음을 한 번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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