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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an 24. 2019

오빠. 같은 값이면 연극보단 영화지

- 그때의 나

“오빠. 같은 값이면 연극보단 영화지.”

“아니지. 같은 값이면 당연히 영화보단 연극이야.”     


예전에 만나던 여자친구와 이런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대학로에서 저녁을 먹고 소극장이 있는 꼬불꼬불한 골목길 안을 걷고 있었다. 포근한 여름 날씨였고, 서툰 버스커들이 길거리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한 일주일 전에 같이 연극을 하나 봤다. 전형적인 대학로 소극장 스타일이었다. 무대 중앙에 의자나 책상 같은 게 한 두 개쯤 있고, 배우들은 총 네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연. 우리는 그마저도 할인을 왕창 받아가지고 봤다.     


그렇게 민망한 연극은 처음이었다. 관객이 우리 커플을 포함해서 딱 네 명 밖에 없었다. 배우들과 동률. 스태프까지 치면 보는 사람보다 만드는 사람이 많은 공연인 셈이었다. 중앙 맨 앞에 나와 여자친구가 있었고, 저만치 뒤쪽에 홀로 온 관객 하나. 우리의 오른편에 또 하나. 그게 전부였다. 안내사항을 전달하는 익살스런 배우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정말 기운 빠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과는 달리 시작시간이 되자 (네 명이 별일이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했다.      


두 시간 남짓한 연극이 끝나고 나는 조금 울컥할 정도로 감동했다. 연극이 재밌었다든가, 기가 막힌 스토리여서가 아니라, 그저 배우들의 열정 때문이었다. 띄엄띄엄 앉은 네 명의 관객을 위해, 두 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열연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어떤 존경심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무엇인가에 이토록 몰입할 수 있다는 점에 적지 않은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커튼콜에 웃으며 손을 흔드는 네 명의 배우들은, 정말로. 멋있었다.     


같은 값이면 영화보단 연극이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라이브로 매번 새롭게 연기한다는 점을 들어 연극 편을 들었고, 여자친구는 연기나 구성의 퀄리티를 내세워 영화 편을 들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라이브로 연기를 하잖아. 그게 만 이천 원이라니 너무 싼 거 아니야?”

“오빠. 낡은 세트에 조악한 소파 하나 놓고 하는데 그 정도면 적당하지. 영화는 건물도 무너지고, 폭발도 하고 그러잖아. 유명 배우들 나와서 연기도 멋지게 하고.”     


당시의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라이브로 내 눈앞에서 연기를 해주는데, 너무 귀하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뱉지는 않았지만, ‘정말 인정이 없네!’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나고 나는 영화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한 달에 스무 편에 가까운 영화를 볼 만큼 영화가 주는 매력에 매료됐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같은 값이면 영화가 나아? 연극이 나아?’ 묻는다면 내 대답은 별 망설임도 없이 ‘영화’ 가 될 것 같다.      


대학로 연극? 그거 대단히 퀄리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우들 한 네 명 나오는 게 전부인데 아이언맨이랑 캡틴 아메리카가 타노스 얼굴에 주먹 날리는 거랑은 비교가 안 되지.     


수없이 많은 영화를 보면서 자주 감탄하는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늘, 그때의 가벼운 논쟁을 떠올리면서 두 가지 정도의 생각을 했다. 첫째는, 그토록 당연하다고 믿었던 마음도 불과 몇 년 사이에 완전히 반대로도 변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그러니까 전혀 납득되지 않는 의견에도 마음 한 구석을 열어둘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그때의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멋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내 눈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같은 연기를 새롭게 반복하는 그 무명배우들에게 진심으로 감응하고, 존경하고, 감사했던 그때의 나. 지금은 그때만 못할 것 같아서 씁쓸하다. 그래서 그때와, 그때의 내가 조금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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