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Feb 04. 2019

설날, 차가 더 막혔으면 좋겠다.

나의 즐거운 귀성길

-경상남도 진주로 가는 중-


좀 이상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명절에 고속버스를 타고 정체를 겪으며 오래 이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동의 목적은 물론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에 있지만, 나에게는 도착만큼 이동의 과정이 중요하고 즐겁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아버지가 운전을 하시고 어머니는 조수석에 있고. 나와 형은 뒷좌석에서 떠들거나 장난을 쳤다. (꼭 한 번씩 싸우는 바람에 눈물 쏙빠지게 혼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 제일 좋아했던 것은 지나가는 풍경에서 질문거리를 찾아 묻는 것이었는데 어머니는 대체로 성실하게 대답 해주셨다.

"사람들은 왜 고속도로 옆에 무덤을 만들어요?" 같은 질문들. 어떤 대답을 해주셨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경상남도 진주는 서울에서 꽤 먼 곳이다. 예전에는 날씨가 궂고 차가 막히면 일곱 시간씩 걸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요즘은 시간만 잘 맞추면 세 시간 반에도 간다. 그만큼 내 사랑하는 여행길도 짧아졌다.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싱겁게 도착해버리는 것에 매번 안타까움을 느낀다.


매번 버스나 기차를 타기 전에는 이동 간에 할 것의 목록을 잔뜩 만든다. 영화를 무조건 하나 다운 받고, 읽어볼만한 칼럼 몇 꼭지의 링크를 북마크해두고, 명반이라고 불리는 생소한 앨범 하나를 메모해두고(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 앨범도 귀성길에 처음 들었다.) 글 하나를 쓰기로 하고(지금 쓰고 있다.), 중간에 멀미가 들면 푹 잠을 자기로 한다.


그런데 막상 잠이 길어지는 경우도 있고, 쓸데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시간을 왕창 보내는 경우도 있어서 실상 준비한 미션들을 모두 해치우기는 어렵다. 그래서 차가 막히기를 바란다. 이번 명절을 놓치면 다음 명절까지 한참이 걸리니까.


누군가 '내려서 하면 될 것을 불편한 버스에서 해야하느냐'고 물어본다면 '뭘 모르시는 군요'하고 대답할 것이다. 버스는 무척 심심하고 불편한 공간이다. 오늘처럼 혼자 내려가는 날이면 외롭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닥 해볼 의욕도 나지 않는 일도 재미있게 느낄 수 있다. 매력이다. 어지간한 영화도 버스에서 보면 재밌다. (나는 멀미도 꽤 있는 편이어서 멀미약 먹고 영화를 본다.) 익숙하지 않은 아티스트의 노래도 버스에서라면 참고 들어볼만 하다. 늘 게으른 내가 버스에서는 글도 이렇게 재미있게 쓰게 된다.


결정적으로 내가 귀성길 정체된 도로와 버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버스에서만큼은 죄책감없이 시간을 낭비해도 되기 때문이다. 막힌 도로 위에서는 무언가 생산적일 필요도 뛰어나고 멋진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 그냥 졸리면 자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 된다. 그도 싫으면 끊임없이 변하는 풍경을 보고있으면 그 뿐이다.


그리고 도착하면 친척들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준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가만히 앉아서 잠만 잤을 뿐인데도 고생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거 쉽지 않다.


조금 있으면 휴게소에 들르게 된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기지개를 켜고 화장실을 다녀온 뒤, 닭꼬치나 통감자를 사 먹을 것이다. 내린 버스의 위치를 헷갈려하면서 잠깐 허둥댈 것이다. 자리에 앉아 벨트를 하면 버스는 다시 도로 위로 스며들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도착까지는 여유가 있다.

에디 히긴스 트리오의 재즈 연주곡을 마저 들을 테고 꾸벅꾸벅 졸다보면 진주의 허름한 터미널이 언제나 그랬듯 그 자리에 있을 테다.


명절은 나에게 늘 여행같다. 이 모든 과정을 패키지로 사랑한다. 나는 정체된 고속도로와 덜그덕거리는 고속버스가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별이 총총한 하늘 밑 초소에 서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