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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Feb 11. 2019

김씨가 아니었더라면

- 김씨의 운명

<최악의 하루>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던 배우 한예리는 원래 김예리로 배우 활동을 하다가 뒤늦게 성을 바꾸었다. 동명이인이 너무 많아 하나밖에 없는 한예리로 하자는 어머니의 추천 때문이었다는데 개명 덕인지 이후 일이 술술 풀려서 전보다 부각 받는 배우가 되었다. 물론 그녀의 훌륭한 연기와 꾸준한 활동 때문이겠지만. 성을 바꾼 덕이 없다고도 할 수 없겠다.           

    

그녀에게 동명이인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명확하다. 김씨가 천만명이 넘기 때문이다. 인구의 오분의 일이 하나의 성씨인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어지간하면 김씨라는 말인데, 그래서인지 내 성도 김씨다.               


나는 성씨마다 결정된 운명같은 것이 있다고 믿는다. 강씨성을 사진 사촌동생은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강씨들은 자기소개를 잘하게 되어있어."     
"어째서?"     
"출석번호가 항상 1번이라서 매년 자기소개를 제일 먼저 하게 되거든"          

     

내가 지니고 있는 이 흔한 성씨에는 평범할 운명이 깃들어있을지도 모른다. 흔하게 살게 될 운명. 어릴 때부터 특별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음에도 이리도 평범하게 자란 것은 아마도 김이라는 성 때문일 것이다.    

          

나는 김 같은 것 말고 좀 더 아름답고 세련된 성을 부러워한다. 내 성이 한씨나 류씨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다못해 민씨나 정씨였다면. 차라리 묘하게 매력 있는 우씨 였다면. 연씨나 임씨였어도 좋았겠다.          

     

친구 중에 지은이라는 흔해 빠진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다. 그녀의 성이 김씨였다면 김지은이라는 맹물에 맹물 탄 것 같은 이름이 되었을 텐데. 성이 한씨다. 한지은. 얼마나 청량한 이름인가. 입에 걸리는 발음도 없고. 그 무난한 이름이 성과 붙어 세련되게 반짝인다. 어지간한 이름들은 한씨와 붙을 때 대체로 아름답다. 한여름, 한지민, 한유진. 대충 생각해봐도 다 그럴듯하다. '한' 이라는 글자는 모양도 예쁘다.       

        

부드러운 어감의 민, 연, 류, 임 같은 성도 좋다. 그들에게는 부드러운 삶이 운명처럼 깃들어있을 것 같다. 성이 말랑말랑해서 조금 딱딱한 이름과 곁들여져도 보완이 되는 듯하다. 아예 맥아리 없이 동글동글한 발음의 이름도 좋을 것 같다. 나는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이름을 좋아한다.       

        

그런데 김씨라니. 흔한데다가 어감이 좋은 것도 아니고 모양이 예쁘지도 않다. 이름을 정면으로 거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세련된 느낌을 주지도 않는다. 박씨도 마찬가지로 별로 아름답게 들리지 않는다. 이씨는 무난한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도화지 같다. 흔한 성은 재미없다.         

      

제사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시대에서 성이 필요할까. 이름만 남은 세상을 상상해본다. 아버지와 성이 다른 자식의 쑥스러움이 필요 없는 세상, 양반이니 상놈이니 무의미한 논쟁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 종이에 적을 성이 사라지는 만큼 잉크를 아낄 수 있는 세상, 동명이인은 몇 십 배 많아질 수 있겠지만 오히려 특이한 이름이 마구 등장할 수도 있는 세상, 오분의 일이라는 평범함을 운명으로 가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        

       

하다하다 성씨로도 불평을 하는거니. 핑계는 많을수록 좋다는 마음으로 쿡쿡 웃으면서 글을 쓴다. 아버지가 이 글을 보신다면 내 꿀밤을 먹이시면서 '이놈아 네가 평범한 건 게으른 탓이지 성에 무슨 죄가 있냐.' 하실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래도 변씨나 방씨보다는 김씨가 좋아요.' 하고 대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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