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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pr 03. 2019

'또 다른 사랑'이야기 <아사코>

영화, <아사코> 리뷰

당부의 말씀     


영화를 본 분만 읽어주시길 (안 보신 분들은 언젠가는, 아사코를 꼭 보시길)          




영화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야 한다. 근래의 (상업) 한국영화가 거의 예외 없이 모조리 별로인 이유는 사실 할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상업영화라고 해서 철학이 없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는데, 그냥 답습한다. 어디서 본 듯한 내용, 뻔하고 유치한 전개, 신파… 등 영화를 통해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시도는 얄팍하고 손익분기점을 넘겠다는 의지만 강렬하게 전달된다.


 <아사코>는 다르다. 나는 이런 영화가 정말 좋다. 예측할 수 없는 면이 있고, 조금 투박한 듯하더라도 하고 싶은 말이 분명히 존재해서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싶어 지는 영화.      


개봉관이 아주 적어서 집 근처에서 영화를 보기는 어려웠다. 이대에 있는 ‘아트하우스 모모’까지 가서 보았다. 덕분에 오랜만에 이대 캠퍼스도 조금 구경하고 해서 좋았다. 이대부속중학교를 졸업하고 거기서 교생실습까지 한 나로서는 갈 때마다 추억이 재생되는 공간이다.     


다시 <아사코>로 돌아와서, 영화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사랑의 또 다른 형태를 보여주었다고 느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술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사랑 말고, 실제적이고 현재적이면서도 의외로 잘 다루지 않은 감정들과 현상들에 대해서 <아사코>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주목하고 싶은 세 가지 포인트가 있다.     

영화: 아사코(2019)

1. 아사코는 왜 료헤이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바쿠 때문이다. 아사코는 바쿠를 사랑했고, 바쿠는 아사코를 하루아침에 떠나갔다. 아사코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할 시간도 없었다. 그들의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급작스러웠고 치명적이었다. 그와의 연애는 아사코의 인생을 압도하는 경험이었다. 바쿠가 떠나간 뒤에도 여전히 아사코는 바쿠를 사랑했고, 그녀에게 그와 똑 닮은 남자가 등장했다. 료헤이다.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30대의 유부녀가 쓴 글이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에 다녀와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더니 친구들이 대학 시절 가장 아름답게 연애했던 상대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 결혼해있더라는 그런 이야기였다. 내 주변의 어떤 친구도 늘 비슷한 외모와 성격의 여자에게만 호감을 느끼고 만나던데, 헤어짐의 이유도 늘 비슷하다. 나 또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이전의 연애 상대와 닮은 점에 끌린 적이 있다.      


우리의 사랑이란 건 어쩌면 새로운 상대의 매력으로 늘 새롭게 리셋되지는 않는 것 같다. 사랑의 경험이 다음 사랑의 전제가 되는 경우는 흔하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지난 사랑을 통해서 앞으로의 사랑을 상상하고, 수정하고,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러니까 지금 누군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그 일부는 지난 사랑의 여파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 또한 사랑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혹은 그녀에게 지난 사랑이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수 있으니까.      


영화 <아사코>는 아사코의 그 불편한 사랑을 통해 넌지시 물어보는 것 같다. 현재의, 당신의 사랑에도 지난 사랑의 그림자가 남아있지는 않은가요? 당신은 오로지 상대를 상대라는 이유로만 사랑하고 있나요? 우리는 영화와 그 속에서 나에게 날아오는 이런 질문들과 마주하며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갈 수 있다.     

영화: 아사코(2019)

2. 누구나 비밀은 있다. (feat. 아이유)     


내가 누굴 탐했었는지 네가 알면 넌 어떤 표정을 할까
내가 어제 무얼 했는지 네가 알면 넌 어떤 얘기를 할까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고 oh 말을 하지만
떠들썩하거나 사소하거나 끔찍한 파문이 일지 몰라
누구나 비밀은 있는 거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 가사 中 -     

친구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내가 저번 주에 헌팅 술집에서 어떤 여자애랑 원나잇을 했거든? 근데 애가 너무 순하고 귀여운 거야. 마음이 잘 맞아서 의외로 순조롭게 모텔로 갔는데, 다음날 일어나니까 어색했는지 먼저 슝 가버리더라고. 근데 걔가 핸드폰을 놓고 갔어. 카톡이 자꾸 오는데 어떤 남자더라고. 궁금해서 클릭해봤는데, 나랑 어제 술 먹을 때부터 잘 때까지 계속 그 남자랑 카톡 하고 있었더라. 근데 그 내용이 진짜 쇼킹이었어. 남자가 진심 어린 애정의 말을 막 보내는데 여자애도 되게 순정파처럼 오빠랑 잘해보고 싶다고, 이런 감정 처음이라고. 달달한 카톡을 보내고 있었던 거야. 근데 걔 그때 나랑 섹스하고 있었거든. 와 진짜 여자들 무섭더라.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벌써 한참 된 얘긴데, 아르바이트 끝나고 퇴근하는 길에, 한 번도 얘기해보지 못한 동료와 마침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이 같아서 말문을 트게 되었다. 금요일 밤이었고 옷을 너무 차려입고 와서 어디 데이트라도 가는 줄 알았는데, 집에 간다기에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제안을 했었다. 그녀도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막상 얘기해보니 일하면서 오며 가며 나를 자주 봤고, 괜찮은 사람으로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그쪽도 예쁜 편이어서 나도 좋았다. 술자리는 무르익어가고, 심상치 않은 눈빛을 서로 교환하다가 모텔까지 가게 됐다. 침대에서 본격적으로 일이 벌어지려는 찰나,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나 사실 남자 친구 있는데 괜찮아?’

‘왜 말 안 했어?’

‘타이밍을 놓쳤어.’

‘어떡하냐 그럼?’

‘근데 괜찮아, 부사관인데 파병 갔어. 내년에나 와.’


그땐 솔직히 이성을 좀 잃은 상태여서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잠깐 만났었다. 그녀는 나와 만나는 사이에도 여전히 파병 간 그 남자 친구 사진을 카카오톡 커버 사진으로 걸어두었다. 나와 흐지부지 된 이후에도 여전히 그랬다. 한참이나 까먹고 살다가 이후 그녀의 남자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쯤 그녀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확인해봤더니 다시 달달하게 연애하고 있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지만, 아주 오래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라도 일부에게는 어떤 일을 평생 비밀로 숨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의 비밀에 대해서는 의외로 무력하다. 그건 노력으로는 절대 알아챌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전적으로 믿어줄 수밖에 없다. 완전무결하고 떳떳한 사랑이 훨씬 더 많으리라 생각하지만(혹은 믿고 싶지만) 세상의 많은 사랑에는 한때의 일탈과 순간의 흔들림. 그리고 그로 인한 실수들이 꽤 많이 섞여있을 수도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는 영원한 비밀로 남겨둔 채로.     


<아사코>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그런 일탈을 알게 되는 것이나 평생 모르고 사는 것이나 모두 비극이지 않느냐고.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영화: 아사코(2019)

3. 그래도 아름답잖아.     


아사코는 바쿠의 손을 잡고 센다이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그녀는 바쿠와 다시 사랑을 나누었다가 뒤늦게 정신 차린다. 그렇게 떠나간 여자 친구를 다시 받아주는 일은 정신 나간 짓이다. 하지만 결국 받아줄 수밖에 없는 료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끊어낼 수 없는 사람의 관계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면서 사는가. 질기고 질긴 인연의 끈. 바람나서 임신해 돌아온 부인을 받아준 남편의 이야기도 종종 있듯이, 세상에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사랑이 많다. 결국 헤어질 걸 알면서도 다시 만나는 커플들과, 바람난 배우자를 용서하는 사람들과, 바람피울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과 연애하는 남녀들이 예측되는 결과를 두고서도 냉철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또 다른 형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남자 만나면 후회한다.’라는 말을 듣고서도, 심지어 자신도 그걸 아는 데도 어찌할 수 없는 마음. 직접 가보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결국 그 길로 가서 데고 마는 어리석음. 사실 사랑에는 그런 멍청한 마음도 녹아있다.     


그리고 흐르는 강물. 비가 와서 불어난 바람에 유속이 빨라지고, 흙탕물도 섞여있는 그 강물을 아사코와 료헤이는 바라본다. 료헤이는 그런 강물이 싫다. 더럽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강물은 흙탕물로 지저분하게 흘러간다. 아름다운 것만 믿고 싶지만 때로 현실이라는 이름은 낭만을 사뿐히 무시하고 지나간다. 인생은 가까이에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채플린의 말을 인용할 것도 없이, 인생은 온갖 추악함을 모두 담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그런 흐름 속에 던져진 존재다. 거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은 그런 추악함마저도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런 인생마저도 우리에게는 단 한 번만 주어지는 것이기에.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어쩌면 참 아름다운 것이다.


아사코는 그래서 그렇게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할 수 있다. 강물, 더럽지만. 그래서 참 아름답지 않느냐고.


영화: 아사코(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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