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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n 04. 2019

미운 가족이 죽는다는 일에 대하여

영화 <하나레이 베이>

[아들은 하와이의 해변 하나레이 베이에서 죽었다. '사치'는 사건 이후 매년 하나레이 베이를 찾는다.]


미워하는 가족을 잃고난 뒤의 마음을, 글이나 방송 인터뷰로 종종 본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지독하게 겉돌거나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아버지, 건달짓을 하며 어머니에게 툭하면 돈을 뺏어가던 오빠. 동네 남정네와 바람나서 젖먹이 자식을 두고 도망가버린 어머니 등 세상에는 참 가족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런 가족이 죽었다고 하면, 덩실덩실 어깨춤이라도 출 것 같은데. 그런 식의 반응은 사실 별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것을 나한테 왜그랬냐고. 보통은 허탈한 감회를 내비쳤다.     


학대나 불편함에 오래 노출이 되어서 타성에 젖었거나, 스톡홀름 증후군 비슷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일 수도 있으나, 사실 가족이라는 그 특수한 관계의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은 너무나 쉽게 정의할 수 있는 단어이면서, 또 그 무엇보다 해석하기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

일본의 영화 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이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라는 말 했다던데. 이 말은 내다버리고는 싶어도 끝내 내다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유효한 말이기도 하다. 호적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고, 영영 다시 아니 만날수도 있으나, 가족이라는 정체성만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주인공 ‘사치’는 마약쟁이 남편의 죽음을 겪고, 후에는 아들마저 잃는다. 기구한 삶이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학대에 가까운 대접을 받으며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 아들은 자신과 늘 불협하고, 모자(母子)는 평균에도 턱없이 못미치는 건조한 관계로 데면데면 지내왔다.      


생활력도 없고, 마약에나 빠져 살면서 심지어 상간녀와 잠자리를 하다가 죽어버린 남편인데도, 그가 죽었을 때 그녀는 후련하지 않아 보였다.


아들 또한 겉도는 데다가 버릇없기까지 해서 ‘사치’에게는 못마땅한 짐같은 존재였음에도 아들의 죽음에 그녀는 온 삶이 뒤틀리고 흔들린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

영화는 사랑하는 가족의 안타까운 죽음이 아니라, 미워하는 가족의 죽음을 조망하면서 가족이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는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묻는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목사인 아버지는 평생 방탕하고 방만한 삶을 살다가 급사한 아들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이웃간의 사랑보다 유독 가족간의 사랑에 어울리는 이 말은 그야말로 무겁게 와닿는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관계는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 단계에서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가 있다. 가족이라는 의미 속에는 ‘그래도’라는 단어 정도는 태초부터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한편 영화의 배경인 하나레이 베이는 아름다운 대자연 그 자체의 모습을 내내 보여준다. 인간은 자연에서 늘 무력한 존재이므로, 자연은 곧 예측할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운명이라 불러도 되겠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

서핑은 자연에 맞서는 스포츠다. 아들은 대자연(혹은 운명)에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다고 믿는 쪽이었고, 그러다가 죽었다. ‘사치’는 반대의 면에 있는 사람으로, 서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운명은 함부로 맞설 수 없는 두려운 존재이다. 대자연에 맞서지 못하고 그저 이리저리 최대한으로 몸을 사리며 견뎌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녀는 운명에 가장 휘둘리는 사람이다.      


‘사치’의 기구한 삶은 운명의 장난같다. 운명이 두려운 그녀는 파도도, 햇빛도, 비도 얼른 피해버린다. 그토록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마음을 가졌던 그녀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마침내 바다로 몸을 담글 때, 비로소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출생의 순간부터 자연에 내던져진 삶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운명에게 휘둘리라는 뜻은 아니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끊임없이 다가올지라도 우리는 그 운명의 파도를 자유롭게 서핑할 수 있는 존재이다.    

  

‘사치’는 마침내 그것을 이해했고,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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