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설국열차가 계급의 문제를 수평으로 드러냈다면, 이번에는 그야말로 수직적인 구성을 통해 계층의 문제, 삶의 조건의 문제에 대해 말한다. 거대한 주제는 결국 계급과 계층이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본질에 대해 다루겠다는 듯, 이야기의 폭이 넓다.
사실은 평점이 조금 왜곡되어 있다고 봤다. 황금종려상을 받은 때문인지, 평균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평점이 너무 높았다. 좋은 상을 받은 영화라는 것 때문에 자칫 자신의 영화 수준이 탄로날까 두려운 사람들이 너도 나도 4점 5점을 주는 것이 아닌지. 불쾌한 우려도 있었다.
정작 직접 보고 크레딧이 올라올 때는 고민 없이 5점을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평균 평점이 높은 것은 대중과 평단을 모두 사로잡을 만한 완성도 때문으로 보인다. 장르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영화가 일단 재미있다. 좋은 영화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고, 배우들의 연기는 빈틈없이 훌륭하며, 깊이 파고드는 만큼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 만큼 탄탄하다. 영화의 깊이가 다섯 단계 쯤 있다면, 영화의 겉만 훑는 1층의 관객에게는 1층대로의 재미를 주는데, 지하 5층까지 파내려갈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디테일을 채굴할 수 있는 광맥처럼 되어 있다. (나는 2층 정도 내려가다 만 것 같지만 아무튼 내려가 보기는 했다.)
영화의 전체를 조망할 깜냥은 되지 않아서 키워드 위주로 복기했다. 해석이나 감상의 영향을 받을까 두려워서 예고편조차 보지 않았는데, 이제 리뷰를 다 쓰고 나면 인터뷰라든지 리뷰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 얼마나 수많은 해석들이 있을 것인가. 기대가 된다.
1. 양반전
영화의 중반부. 지하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조선 중기 박지원이 쓴 양반전의 21세기적 재해석처럼 보였다. 모든 것 위에 돈이 있고, 돈이 신분을 재편하는 세상. 돈이 있으나 돈을 버는 속도에 비례하지 못한 신흥 계급의 교양은 하층민에 의해 조롱된다. 조여정의 허영심은 순진함, 무식함과 뒤섞여 묘사되고. 어설픈 교양은 금세 바닥을 내보인다. 박지원의 양반전과 전혀 다른 지점은, 양반의 허위만을 조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생충에서는 위든 아래이든, 모두 풍자의 대상이 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양반 뿐만이 아니라는 것. 졸부는 졸부대로, 천민은 천민대로의 후안무치함이 있고, 그것들은 한데 뒤섞여 괴이하게 떡져 있다. 이 세상에 얼마나 수많은 믿음의 벨트들이 권력과 친분이라는 이름으로 결탁하여 기생하고 있는가도 말하지만, 얼마나 많은 그 부정과 부패가 또 얼마나 많은 기생충들에게 피를 빨리며 이 세계를 가동하고 있는지도 같이 드러내면서 허탈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실로 기묘한 공생이다.
2. 수석
수석은 돌에 불과하다. 그건 그냥 돌이다. 그냥 자연에 멀쩡히 놓여있다가 누군가가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돌은 수석이 된다. 수석의 가치는 귀하나,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유효하다. 음식은 동물에게도 귀한 것이지만, 수석은 동물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수석에는 사피엔스 특유의 미감이 서려 있는 셈이다.
이는 사람에도 비유할 수 있고, 돈에도 비유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수석은 누군가에겐 돌이고, 누군가에게는 수석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살해 도구이다. 자연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귀한 존재가 되고, 출처가 불분명한 권위에 의해 귀한 것으로 둔갑 되기도 한다. 또 어느 경우에는 살인자가 되기도 한다. 수석처럼.
약속된 아름다움. 가치부여. 이런 단어들로 수석을 이해할 때, 이는 화폐와도 닮아 있다. 돈은 그야말로 약속된 가치이다. 다수가 돈을 돈으로 약속한 순간, 종이에 불과한 돈은 세상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가치가 된다. 돈 또한 누군가에게는 돈이고, 누군가에게는 살해 도구가 된다. 그러니까 기생충에서 수석은 인간과 돈이라는 개념과 맞물려 돌아가는 사물이다.
3. 물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같은 높이에서 출발해서 지구의 중심으로 떨어진다. 떨어진 후에는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 비는 그야말로 정직하다. 저항 없이 낮은 곳부터 채운다. 낮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서 결코 높은 곳으로 먼저 도달하는 법이 없다. 그 물이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고이는 공간에 기우의 가족이 산다. 반지하에 물이 가득 찬 모습을 보면 그곳이 자연적으로는 살 수 없는 곳임이 드러난다. 천장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물이 가득 찬다. 물이 고인 집의 풍경은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바닥의 존재들이라는 것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한 둘이 아닌 반지하형 가족들은 나중에 임시 대피소를 물처럼 가득 채운다.
4. 인디언
인디언은 다송을 통해 영화의 전체를 관통한다. 아메리칸 원주민들은 자신의 땅에서 쫒겨나 관리구역에 수용된 존재들이다. 종래에는 수용된 삶에 적응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지하실에 적응한 두 남자는 세상에서 타의로 내몰렸다가, 결국에는 작은 공간에 스스로 적응하게 된다. 현대판 인디언이다.
5. 냄새
냄새는 신분의 아이덴티티를 상징한다. 부유함과 가난함에서 나오는 모든 습관과 자세는 냄새와도 같다. 한 두 가지를 꾸며내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으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꼭 티가 난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의 자세나 여유나 미소를 흉내낼 수는 있겠으나, 부자에게 잠재된 모든 분위기까지 카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이 냄새는 IT기업의 CEO인 아빠이자 남편, 동익의 ‘선’ 개념과 부딪히며 증폭된다.
6. 선
동익은 젠틀한 사업가다. 그는 교양있고, 나름대로 똑똑하며, 자상하기까지 하다. 그를 대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단 하나 선을 넘지 않는 것 뿐이다.
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은 분명한 계급의식이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믿음. 그리고 침범을 용서치 않겠다는 경고다. 윤 기사가 카섹스를 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할 때에도 그는 ‘자기 자리에서 하지, 왜 내 자리에서 하냐’고 말하는데, 이 대사는 자기 차 안에서도 나의 공간과 너의 공간이 나뉘어있다는 그의 독특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자신의 차에서 섹스를 했다는 것보다 선을 넘었다는 것이 불쾌한 것이다.
그에게는 수직과 수평을 가로지르는 가상의 선이 있는데, 기우의 가족에게는 절대 섞이지 않겠다는 의지로 수직의 선이 그어지고, 수평의 선은 가족에게 그어진다. 그에게는 가족마저도 섞일 수 없는 존재다. 그가 기택이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불쾌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랑은 선을 흐리게 만들 뿐이니까. 그에게는 그저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런 그가 냄새에 민감한 이유 또한 이것으로 알 수 있다. 냄새가 자꾸 선을 넘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는 그 자리에 있어도, 냄새는 자꾸만 선을 넘는다. 나와는 섞여서는 안 되는 인물이 자신의 영역에 불쾌한 존재감을 드러내니까, 그는 냄새를 참을 수가 없다.
7. 지하실
‘버닝’의 남산 보이는 집과 지하실은 모두 바람직한 주거의 공간과는 거리가 멀다. 볕이 들지 않는다. 도시에서 부자와 빈자를 나누는 것은, 접근성, 면적, 그리고 볕이다. 가난한 삶은 단순히 멀고 좁은 집에서 산다는 문제가 아니다. 공짜로 주어지는 햇볕조차도 그들에게는 순순히 제공되지 않는다. 볕은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성과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반지하가 차마 ‘반’ 이상 내려가지 않고 머리를 조금 들고 있는 것은 부산물 같은 볕을 조금이라도 확보하기 위함인데, 지하실에는 볕이 전혀 없다. 그곳은 존엄이 거세된 공간이다. 그러므로 그곳에 적응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한 사람이 된다. 눈부신 볕이 쏟아지는 정원에서 기택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이 차마 포기할 수 없는 존엄 때문이라면, 기택이 다시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은 끝내 존엄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8. 그 외
+영화는 한국적이지만 전통적이지는 않았다. 황금종려상을 받은 배경에는 그 균형감각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반지하 형식의 주거문화와 비오는 날의 침수, 노상방뇨하는 한량 등은 한국식 슬럼 특유의 분위기를 잘 드러냈다.
+가족들은 모두 저렴한 필라이트를 마시다가, 일이 잘 풀린 후에는 삿포로를 마시는데, 그때에도 여전히 엄마는 필라이트를 마신다.‘아줌마’&‘어머니’ 특유의 생활력.
+한식 뷔페에서 고기를 덜어주는 기택의 모습을 얼마나 우스운가. 무능력하지만 자식을 아끼는 아버지 마음은 한식 뷔페에서, 정원에서, 점차 강화되며 드러난다. 때문에 지하실에서 묵묵히 숨어 사는 그의 모습에는 진한 진정성이 있다.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말. 루저에게 계획은 의미없고 늘 틀어진다. 머리칸의 사람들에게는 계획이 필요없고, 꼬리칸의 사람들에게는 계획이 부질없다.